[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32) 통일 독일에서 배운다

입력 2013-11-10 17:25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어떻게 진행됐나

1990년 독일 통일을 완성시킨 헬무트 콜 전 총리는 “그는 베를린 장벽과 가시철망을 넘어서는 교량, 우리의 동쪽 이웃과 남북을 이어주는 다리를 만들었고 분단국가를 통일로 실현시킨 인물이었다”고 회고했다. 콜 총리가 언급한 그가 바로 20여년 전 분단국이었던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다. 그는 현재 독일 국민들에게 통일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동방정책(Ostpolitik)의 문을 열다

브란트는 1969년 총리 취임 연설에서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한다. 독일 민족은 협력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연설은 동독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한다는 의미로, ‘동방정책’의 출발점이 됐다.

브란트는 구체적으로 동·서독이 ‘규제된 병존’ 관계에서 ‘공존(Miteinander)’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독일에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두 국가는 서로 외국이 아니고 그 관계는 특수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정부 간 차원의 동·서독 회담을 개최하는 것을 추진했다. 이는 ‘서독이 모든 독일을 대표한다’는 기존 아데나워 정부의 통일·외교 정책인 서방정책(Westpolitik)을 뒤집는 것이었다.

화해와 공존으로 통일 정책의 가닥을 잡은 브란트는 거침없이 동방정책을 실행했다. 1970년 3월 19일 그는 국경을 넘는 특별열차에 몸을 실었다. 전날 서독 수도 본을 떠난 10량의 기차는 다음날 동독 지역인 게어스퉁겐에 도착해 동독 기관차로 교체됐다. 그는 동독 지역인 에어푸르트역에 도착해 영접 나온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와 악수를 나눴다.

독일 분단 25년 만에 이뤄진 양국 정상의 역사적 첫 만남이었다. 동독 주민들의 성원은 뜨거웠다. 동독의 엄혹한 정치 풍토에서 주민들은 그의 숙소인 에어푸르트호프 호텔까지 몰려와 “빌리는 창가로 나오라”는 구호를 일제히 외쳤다. 브란트는 훗날 회고록에서 “이날 군중들의 모습에서 독일이 분단됐지만 어쩔 수 없는 한 민족임을 절감했다”며 “이들의 희망을 지켜줘야겠다는 결의를 다졌다”고 술회했다.

#‘세기의 사죄’로 주변국 마음 움직인 브란트

그의 화해 행보는 주변국으로 이어졌다. 먼저 1970년 12월 7일 오랜 기간 분쟁이 많았던 폴란드를 방문했다. 비가 흩날리는 날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유대인 기념비를 찾은 그는 헌화한 뒤 한 걸음 물러난 후 돌연 차디찬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30초간 양손을 맞잡고 머리를 숙였다. 바로 ‘세기의 사죄’로 불리는 기념비 참회였다. 당시 언론들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전범 독일 총리의 진심어린 사죄였고, 이 사죄는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이듬해인 1971년 10월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의심어린 눈초리로 서독을 바라보던 서유럽과 동유럽이 브란트의 사죄 이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72년 6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개국이 ‘동·서독 현안은 독일 내부 문제’라는 내용의 베를린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동유럽과의 화해 무드도 조성됐다. 1973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국교정상화 조약을 시작으로 헝가리, 불가리아와의 국교를 회복했다. 이 동방정책은 1974년 5월 그가 사임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서독 통일·외교 정책의 근간이 됐다.

#서베를린 시장 시절 때부터 이미 시작된 동방정책

브란트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10년간 서베를린 시장을 지냈다. 그가 서베를린 시장이었던 1961년 8월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고, 서베를린이 서독으로부터 고립되는 ‘베를린 위기’도 발생했다. 하지만 그는 베를린 장벽을 ‘수치의 장벽’이라 부르며 무력화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장벽을 넘어오는 동베를린 시민들을 향해 동독 감시병이 총을 쏠 경우 이에 맞서 발포하겠다는 엄명을 내리며 사선을 넘는 동베를린 시민을 보호했다.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이 1963년 6월 서베를린을 방문해 “나는 베를린 시민이다(Ich bin ein Berliner)”라는 연설을 한 것도 브란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있던 때였다. 서독은 1963년 동독과 통행증 협정을 성사시켰다. 서독 주민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동베를린의 가족과 친척을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서베를린 시장으로 재임하는 기간 서베를린 시민 120여만명이 동베를린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방정책의 전제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체제 유지

브란트는 좌파로 구성된 사회민주당(SPD)에서 배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체제를 수호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 그가 1972년 채택한 ‘급진주의자 훈령’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극좌세력들이 서독의 모든 공직·기업·사회에서 활동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를 통해 그는 통일 독일이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돼야 한다는 점을 천명했다. 서독은 ‘급진주의자 훈령’과 함께 1951년 사회주의제국당(SRP)과 1956년 독일공산당(KPD)에 대한 위헌정당 판결 등을 통해 민주적 평화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베를린=모규엽 기자 hirt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