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마다 독립영화제 열풍] 레드카펫 없으면 어때! 열정만큼은 뜨거운 내 고장 영화잔치
입력 2013-11-09 04:00
서울과 부산, 전북 전주 등지에서는 해마다 국내외 영화인들의 축제가 열린다. ‘국제영화제’다. 유명 배우들과 감독, 영화관계자들이 레드카펫을 밟고 플래시 세례를 받는다. 하지만 같은 지역에서 같지만 다른 영화인들의 작은 잔치가 매년 개최된다. ‘독립영화제’다. 국제영화제에 비해 초라하지만 열의에 찬 사람들의 시네마천국이다. 서울과 대구, 대전 등의 도심은 물론 강원도 바닷가에서 영화를 사랑하고 창작의 자유를 갈망하는 축제가 쉼 없이 열리고 있다. 세계적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처럼 최고의 영상 터전을 만들겠다는 의욕을 다지며 필름과 영사기는 올 가을에도 돌아가고 있다.
8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에 있는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앞. 가을바람에 노란 현수막이 나부끼며 오가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2013 전북독립영화제.’ 이곳은 2001년 시작된 이 영화제의 13번째 축제가 열리고 있는 곳이다.
올해 영화제는 ‘말하는 大路, 맘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라는 주제 아래 7일부터 닷새간 펼쳐지고 있다. 선보이는 영화는 모두 41편. 영화 분량이 짧다 보니 개막작은 전정치 감독의 ‘지상의 밤’ 등 세 편이 연이어 상영됐다. 이영호(74) 전북독립영화제 조직위원장은 8일 “영화제는 전국의 독립영화와 만나는 소통의 광장”이라며 “같은 시대 개성 있는 작품들과 함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독립영화제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열리고 있다. 각 지역의 독립영화협회에서 주최한다.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단편극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직접 만나보고 전국 독립영화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맏형인 서울독립영화제는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 1975년 한국청소년영화제로 출발해 2002년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했다. 오는 28일부터 9일간 39번째 잔치를 준비 중이다.
정동진독립영화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야외에서 열린 독립영화제다. 정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올해로 15년째 여름마다 휴가객들을 중심으로 잔치를 폈다. 지정 좌석이 없고 아무 때나 입장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하루 세 팀에게 제공되는 ‘VIP 좌석’에는 누워서 영화를 볼 수 있는 돗자리와 모기장, 모기약, 옥수수, 뻥튀기 등이 선사된다.
박광수(40) 프로그래머는 “야외이기 때문에 가족단위 관람객들이 굉장히 많다”면서 “별도 보고 바닷바람도 쐬며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영화를 즐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광주인권영화제’는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제다. 1996년 시작해 4회까지는 서울인권영화제의 지방순회 방식으로 개최됐으나 이후 자체 영화제를 열고 있다. 2010년엔 ‘그만 파쇼’라는 주제로 4대강 사업이 생태환경에 끼치는 영향과 밀어붙이기식 추진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제주영화제는 ‘독립영화제’이면서 ‘인디문화축제’다. 2009년 중단됐다가 올해 부활했다. 영화의 불모지였던 섬에 독립영화의 싹을 틔웠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들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대부분 ‘저예산’이자 ‘단편’ 영화다. 제작비가 많아야 수천만원이고 분량도 20분 내외로 짧다. 독립영화가 외국에서는 ‘창작의 자유’에 중점을 둔 영화로 지칭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업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개봉관에서 만나기 힘든 부류의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한 영화제의 상영 작품 수는 30∼100편. 주제는 노동과 인권, 장애인, 청소년, 환경 등이 중심이다. 서울은 올해 역대 최대인 117편을 올린다.
이곳에서 관객을 500명 이상 모으는 영화는 ‘대박’ 영화다. 상업영화에서는 1000만명 이상이 찾는 영화가 곧잘 나오고 있지만, 독립영화의 관객은 그의 1만분의 1도 안 된다. 전북영화제는 1000명 안팎이고 서울영화제서도 6500명이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자부심은 대단하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2011년 전주에서 대상을 받은 이수유 감독의 ‘그대에게 가는 먼길’은 세계 3대 단편영화제인 템페레영화제(핀란드)의 경쟁작으로 공식 초청받았다.
김은아 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램 팀장은 “관객 수에 따라 위상이나 가치를 판단하면 안 된다”며 “영화제는 감독과 작품을 발굴하고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영화와 문화에 대한 저변을 넓히는 산실이다”고 말했다.
이들의 가장 큰 주안점은 지역영화를 발전시키기 위한 방안이다. 부산은 영화관련 학과가 있는 대학이 5개나 있는 특성을 살려 지역 작품들로만 경쟁을 펴고 있다. 전북은 ‘온고을 경쟁’, 대구는 ‘애플시네마’, 제주는 ‘트멍섹션’ 등의 차림표로 지역영화 섹션을 따로 진행하고 있다.
재미난 행사도 많다. 정동진에서는 매일 밤 관객들이 감명 깊게 본 작품의 감독에게 동전을 주는 ‘투전관객상’ 이벤트를 실시한다. 모인 동전은 가장 많이 받은 감독에게 상금으로 전달된다.
하지만 영화제의 현실은 춥고 배고프다. 각 영화제의 전체 예산은 수천만원에 불과하다. 서울의 경우 영화진흥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4억원을 쓸 수 있는 상황이나 다른 지역은 몇 천 만원에 불과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영화협회들은 공동 발전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3년 전 전북과 부산, 대전의 독립영화협회가 모여 ‘한국독립영화제연대’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이후 개막작을 공동으로 만들어 상영하고, 수상작을 모은 DVD도 매년 제작한다.
지난해 전북독립영화제를 본 한 관객은 이런 응원의 글을 올렸다. “아직도 작고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한 영화제임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매년 관객이 늘고 있고 내실은 부단히 쌓여가고 있다. 차분히 성장하다 보면 1년 뒤에는 조금 더, 그 1년 뒤에는 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전주=김용권 기자, 전국종합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