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김성수] “우리가 세상의 최고·∼” 촌장님의 사랑 가슴에 메아리가 되다
입력 2013-11-08 17:31 수정 2013-11-08 22:57
정신지체장애인 재활시설 ‘우리마을’ 촌장
김성수 성공회 주교
서른넷 늦은 나이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공회 신명(信名·세례명)은 '시몬'. 대한민국 최초의 정신지체장애인 특수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해 교장으로 10년 넘게 일했다.
1984년 성공회 주교, 90년엔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대주교 서품을 받았다. 87년엔 성공회 서울교구장으로 서울 정동 주교좌성당에서 6·10국민대회의 서막이 된 '4·13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해 역사의 한가운데 섰다. 2000년엔 선친에게 물려받은 인천시 강화도 온수리 9919㎡(3000평) 대지에 정신지체장애인 직업 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설립했다.
2000년 70세에 성공회대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05년 은퇴해 지금은 우리마을 촌장 할아버지로 살고 있다. 시몬 김성수(83) 주교가 걸어온 길이다.
‘사형선고’를 받다
청명한 11월 초순, 강화도 우리마을 입구에 들어섰다. 예쁜 돌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장애인들의 작업장인 콩나물 공장을 지나자 원형으로 배치된 2층짜리 목조건물이 나왔다. 1층 사무실에 들어서자 카디건 차림을 한 훤칠한 키의 멋쟁이 촌장, 김 주교가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유∼ 은퇴한 할아버지, 뭐 볼 게 있다고. 지금은 개미 쳇바퀴 돌듯 자고 먹고 쉬고 친구들과 놀며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러면서 최근 몇 달간 조금 바빴다고 했다. 그는 지난 8월 나눔과 섬김 활동의 공로로 만해대상 평화부문을 수상했다. 이후 각종 인터뷰 요청에 시달렸다.
“80평생 사는 동안 내가 하고 싶다거나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남들이 좋게 봐주네요. 평생 말없이 조용히 베풀며 사신 어머니를 따라 살았을 뿐인데 말입니다. 어머니는 밥이 없어도 거지를 그냥 보낸 적이 없었어요. 신학교에 갈 수 있었던 것도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 덕분이었지요.”
김 주교는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성공회 가정에서 2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등학생 때는 아이스하키부에서 주먹을 날리고 별명도 ‘개뼉따구’일 정도로 건강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대입 신체검사에서 덜컥 낙방하고 말았다. 폐결핵이었다. 의사는 “넌 오래 살기 힘드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사형선고와 같은 진단을 내렸다. 당시 폐결핵은 불치병이었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6·25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폐결핵 환자가 있는 집’이라며 공산군도 그의 집을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밥만 먹고 잠만 자며 8년을 허송세월했다. 부모는 전쟁통에도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든 주사와 약을 구해왔다. 덕분에 재산도 많이 까먹었다. 그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니던 그가 스스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하나님이 저를 살려주셨잖아요. 그렇게 거저 받았으니 나도 거저 누구에게 줘야 한다는 생각이 잠재의식에 자리잡았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뭘 하고 싶어서 한 게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약자 편에 서다
대학 졸업 후에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수원의 회사에서 근무했다. 직장을 다니며 동네 성공회 보육원 아이들과 자주 놀았다. 천방지축으로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지켜본 동네 아주머니가 이런 말을 했다. “시몬 아저씨는 신부님이 되면 좋겠어.”
처음으로 신학교를 생각했다. 서른이 넘어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빈자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그의 눈에도 소외이웃들이 보였다. 하루 종일 일해도 꽁보리밥 한 그릇을 겨우 먹을 수 있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했다.
64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성공회에서 운영하는 수원 보육원의 아이들이 성장해 모두 떠나자 대한성공회 초대 이천환 주교가 제안했다. 장애인을 위한 새로운 선교를 해보라고. 74년 지적장애인을 위한 국내 첫 학교인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했다.
“당시 우리나라 형편은 건강한 사람도 교육받기 힘든 상황이었어요. 하물며 몸이 불편한 이들은 어땠을까요. 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부모는 밖으로 아이들을 노출하는 걸 꺼렸는데, 예상 밖으로 학교에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성베드로학교 학생들이 졸업할 때쯤 되자 학부모들이 새로운 요구를 했다. 졸업해도 갈 데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 우리마을을 만들었다. 선산을 기증하고 건축비를 모금했다. 답답한 마음에 정동의 주교좌성당 앞에서 점심 때 1시간 동안 커피를 팔았다. 한 잔에 500원. 작은 정성을 모으는 자리였는데,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주변 커피 가게들이 강하게 반발해 1년 만에 접었다. 감사하게도 당시 보건복지부 손학규 장관이 20억원을 지원해 건축을 진행할 수 있었다.
김 주교는 빈민과 사회적 약자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면서 대한성공회 대주교, 초대 관구장을 지냈다. 관구는 한 나라에 주교가 3명 이상일 경우 영국 성공회로부터 독립해 자치를 하는 것이다.
다문화가정을 이루다
성공회는 1889년 한국에 소개됐다. 신부, 수녀가 있어 가톨릭으로 오해받기도 했으나 성공회는 개신교 교파의 하나이며 영국 국교다. 종교개혁 시기에 가톨릭에서 분리돼 기본적으로 신학이 개신교와 동일하다. 성공회 신부는 결혼이 가능하다. 현재 한국에는 신도 5만명, 전국에 100여개 성공회 교회가 있다.
김 주교는 폐결핵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청년선교를 하던 한 여성의 열정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 파란눈의 선교사인 김후리다(80) 여사다. 가족의 반대가 전혀 없었다. 결혼을 포기한 아들이 장가를 간다는데, 외국인이라는 게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선구자적인 김 주교의 결혼은 당시 언론에서 대서특필됐다. 그는 서른아홉에 후리다 여사와 결혼했다.
결혼 선물은 소박했다. 영국인 장인은 30년 입은 자신의 양복을 사위에게 물려줬다. 소매 끝과 앞섶에 가죽을 덧댄 장인의 양복은 지금도 필요할 때마다 즐겨 입는다. 김 주교는 이날 입은 카디건도 40년 된 옷이라고 했다. 신부가 된 이후 옷을 한번도 산 적이 없다고 했다. 후리다 여사도 입던 옷마저 어려운 이웃들에게 벗어줘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동서양의 문화차이 때문이었다. 시어머니와 의사소통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늦은 시간에 손님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이나 자녀교육에선 많은 의견차가 있었다. 자녀들도 외모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데도 김 주교는 고집스럽게 일반학교를 다니게 했다.
후리다 여사도 김 주교 못지않게 바빴다. 한국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성베드로학교에 미8군 아이들을 위한 외국인 특수반도 만들었다. 한국의 가난한 현실을 본 후리다 여사는 종이상자 등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장난감 도서관을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장난감을 싣고 어디든 달려가 빌려줬다. 1주일 후 수거해 말끔하게 수리한 다음 또 다른 동네에 갖다 주는 일이다. 내년 한국에서 열리는 장난감 도서관 대회를 위해 여사는 현역으로 뛰고 있다.
“남의 아이들에겐 그렇게 관대했는데, 제 자식에겐 그리 너그럽지 못했어요. 요즘 손주 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왜 그땐 그런 여유를 못 느꼈을까요.” 한창 바쁠 때 가족의 아픔을 알지 못했던 김 주교는 요즘 증가하는 다문화가정을 위해 우리 사회의 관심을 촉구했다.
장애인 친구들, 최고다!
우리마을에서는 나이불문 모두 ‘친구’다. 70여명의 친구, 직원이 함께 생활한다. 성베드로학교를 졸업한 18세 이상 지적장애인들은 콩나물 공장에서 무농약 친환경 콩나물을 재배하고, 전자부품도 조립한다.
“콩나물은 물이 중요한데 우리마을은 지하수가 좋아요. 콩나물 맛좋기로 소문이 났지요. 풀무원과 조계사에서 구입해주고 있어요. 장애인을 돕는 일에 종교를 가리지 않아 더 감사합니다.”
평균 35세의 지적장애인 18명은 우리마을 기숙사에서, 18명은 10분 거리의 그룹홈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친구들은 강화도에서 출퇴근한다. 이들은 많게는 80만원의 월급을 받는다.
“우리마을의 한 여자친구가 첫 월급으로 25만원을 받아 어머니께 속옷을 선물했어요. 살면서 ‘바보’ 소리만 듣던 아이였는데,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오자 그 어머니가 밤새도록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 친구처럼 장애인도 열심히 일해 돈을 벌고 다같이 웃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현재 우리마을은 수용 인원을 늘리지 못하고 있다. 직업시설이어서 비교적 신체가 건강한 장애인만 받는다. 김 주교는 그게 참 안타깝다.
“시설을 늘리고 지적장애인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자가 지원되면 더 많은 장애인을 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네요. 복지사뿐 아니라 상근을 하지 않더라도 특수교사, 의사, 물리치료사, 언어치료사, 정신과 의사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을 변화시키려면 손이 많이 가요. 정부의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기존 친구들이 60세에 퇴직을 해야 새 친구를 받을 수 있다. 앞으로 5년이 지나야 퇴직자가 나온다. 그런데 김 주교는 그 일도 걱정이다. “이들을 가정으로 돌려보낼 경우 80∼90세 부모들이 나이든 자녀를 어찌 돌볼까 걱정이죠. 그들을 위해 남은 땅에 양로원을 세우고 싶지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요. 정부 지원, 콩나물 판매, 개인 후원으로 운영되는 우리마을에 더 큰 관심을 가져줬으면 합니다.”
김 주교는 옆에 있던 어린 친구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늘 친구들과 외치는 구호가 있다며 자랑했다. “우리는∼ 최고다!” 세상에서 위축돼 살지 않게 하려고 할아버지 촌장님이 생각해낸 멋진 메아리였다.
강화=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