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희 소설집 ‘향나무 베개를 베고 자는 잠’

입력 2013-11-07 17:17


몸이 없으면 어떻게 세상을 만날 수 있을까. 몸이 없으면 어떻게 이 세상을 건널 수 있을까. 시인, 소설가, 평론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김용희(50)의 소설집 ‘향나무 베개를 베고 자는 잠’(작가세계)은 이런 질문들을 앞세워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몸에 관한 사유를 환기시킨다.

표제작에 등장하는 유부녀는 또 다른 등장인물인 독신남의 대학 동창생이다. 두 사람은 졸업 후 우연히 다시 만나 부적절한 관계를 맺지만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소한 말다툼과 사건들로 삐걱거리며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는다. 고분 발굴 학예원인 남자와 여자는 두 달 전 심하게 다툰 후 서로를 더욱 그리워하지만 자존심 때문에 아직 만남을 미뤄놓은 상태다.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는 방식은 이런 문장으로 환치된다. “길을 걸을 때 사람들은 남자의 몸을 관통해서 지나간다. 누군가 남자의 배를 통과하고 하면 누군가가 남자의 머리를 관통한다. 아무렇지 않게. 며칠 전에는 한 남녀가 남자 몸통을 통과해 지나갔다. 어, 왜 이래? 남자가 소리쳤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남자의 몸통을 빠져나와서 팔짱을 꼈다. 남자는 자신이 공기가 된 것 같았다. 유령이 된 것 같았다. 요즘 왜 이럴까? 남자는 생각한다.”(12쪽)

남자는 고분을 발굴하다 죽음과 삶 사이 계속되고 있는 사랑을 생각하며 향나무 빗을 산다. 그리고 향나무 냄새를 맡으며 여자에게 선물로 주게 되면 여자가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미 두 달 전 여자는 남자와 다투고 빗길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남자는 향나무 빗을 만지며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떠올린다. “남자는 여자의 흑갈색 머릿결을 어루만지듯 빗살을 튕겨보았다. 빗살은 천년을 기다린 악기처럼 맑게 울었다. 남자는 나무빗을 코로 가져가 향을 맡는다. 향은 천년을 품어온 깊은 잠처럼 남자의 코끝에서 어른거린다.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남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34쪽)

여자는 이미 죽음 저편에 가 있지만 남자는 여전히 그녀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며 향나무 빗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기억의 지층에서 발굴되는 여자의 몸은 향냄새와 함께 남자에게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 된다.

또 다른 수록작 ‘혀를 머금은 혀’는 예순에 가까운 마리아라는 신앙 깊은 여인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불치병을 앓고 있는 십대 소년과의 뜨거운 욕정을 나누는 이야기다. “마리아는 아이의 혀가 마음껏 자신의 입속을 돌아다니게 입을 열어주며 생각한다. 아이의 혀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체위로 움직였다. 마리아는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자신의 몸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그것은 매혹이었다. 삶이란 한지에 번지는 먹물처럼. 욕망은 어디로 번질지 모르는 혼돈 속에서 아름다웠다. 마리아는 그 혼돈을 사랑하기로 한다.”(57쪽)

마리아는 ‘새로 찾은 순결’에 대하여 환희와 고통을 느끼지만 갑작스럽게 그 소년이 병동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찾아오게 된 죄의식과 동시에 소년이 죽기를 바라는 교활한 이중성을 보여준다. “마리아는 두려운 듯 고해소 문을 바라본다. ‘혹여 아이가 나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건 아니겠지?’ 마리아는 좀 전에 자신이 간절하게 빌던 기도가 떠올랐다. 마리아는 불안한 고통과 교활함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제단 앞을 바라보았다.”(62쪽)

김용희의 소설은 이렇듯 남녀 간의 에로스적 관능이나 여성적 생명성,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근원적인 문제를 절제된 문체로 보여준다. 그것을 몸에 묻힌 관능의 기억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집은 그 기억을 발굴한 고고학적 작품집으로 기억될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