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지금, 여기, 함께 만드는 ‘천국과 가까운 곳’

입력 2013-11-07 17:18 수정 2013-11-07 22:18


나우토피아/존 조던·이자벨 프레모/아름다운 사람들

유토피아(Eutopia). 중세시대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동명의 저서에서 소개한 이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란 뜻의 그리스어 ‘유토포스(U-topos)’와 ‘행복한 장소’를 의미하는 ‘에우토포스(Eu-topos)’를 결합시킨 말이다.

교수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발하게 사회 운동을 펼쳐온 두 저자는 ‘완벽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유토피아적 환상 때문에 오히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대신 이들은 크리스 칼슨이 2008년 발표한 ‘나우토피아(Nowtopia·지금 천국)의 개념을 소개하며 진짜 유토피아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 실현 가능한 실천의 태도’라고 재정의한다.

이 책은 글로벌 금융 위기로 자본주의가 한계에 봉착한 뒤 이들이 유럽에서 현재 진행형인 대안 사회를 찾아 나섰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그 출발은 2007년 영국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 제3활주로 건설을 반대하며 설치했던 ‘21세기 시민불복종캠프’였다. 이어 유럽 전역의 11개 유토피아 공동체를 누빈다.

스페인의 무정부주의학교 ‘파이데이아(Paideia)’, 유토피아 공동체의 대명사 ‘롱고 마이(Longo Mai)’,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란 호칭과 독재자의 전횡이 벌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마리날레다(Marinaleda)’ 등 흥미로운 공간들을 만날 수 있다. ‘나우토피아’를 표방한 이들의 목표는 소박했다. 절대 성공도 아니요, 현재 진행형인 과정이지만 지금의 자본주의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덴마크 코펜하겐 중심부의 ‘자유 도시(Free town)’ 크리스티아니아. 이곳은 오래된 해군기지였는데, 1971년 한 청년 집단이 녹지를 확보하고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군대 병영의 울타리를 무너뜨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집 없는 사람들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히피들이 모여 방치된 건물을 점유했고, 이듬해 소유주인 국방부와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가 협약을 맺음으로써 사회적 실험장으로 인정받았다. 약 12만평 규모의 땅에 10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1997년부터는 자체 화폐 뢴도 발행하고 있다. ‘히피 마을’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적인 관광 명소로 소개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의 약자들이 대거 수용되면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해시시 등 마약을 허용하면서 중독자들의 천국으로 소문이 나 부랑자와 마약꾼들이 대거 유입돼 공동체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북동쪽에 위치한 칸 마스데우. 이곳은 유기농업에 바탕을 둔 농경 공동체로 노동의 가치를 복원하고 자본주의의 핵심인 소비문화에 반기를 들고 있다. 2001년 활동가들이 50년 넘게 방치돼있던 한센병 환자를 위한 시설을 점거한 뒤 이 지역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빈곤층 이웃들과 손잡고 건설한 곳이다. 급여 제도나 상품 구매 등 금전 거래를 최소화한다. 물자와 노동력을 교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도입했다. 처음 방문하는 이들도 비트 까기 등 노동력을 제공해야 식사를 할 수 있다. 이들이 하는 노동은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일에 대한 대가가 돈일 수 없으며, 그 일로 인해 생산된 것이나 제공된 것 자체에 의미를 둔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11곳의 공동체는 반(反)체제 저항정신을 표방하고 있다. 무단점유 등의 방식으로 시작된 곳이 많아 정부 기관과 충돌 및 마찰을 빚기도 한다. 정부와 제도권 기관은 수시로 이들을 감시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개입을 시도해왔다. 기성 언론과 제도권 학자들 역시 이런 시도들을 곱게 바라보지 않는다. 현 사회의 기존 질서에 반하는 행동에 질색하는 독자라면 펼쳐볼 이유가 전혀 없는 책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 체제 안에서도 독자적인 소규모 공동체 건설이 정말 가능한지, 다른 삶의 형태를 살 수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반가운 책이 될 것이다. 이민주 옮김.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