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근대라는 텍스트의 현재성을 환기

입력 2013-11-07 17:20


근대의 역습/오창섭/도서출판 홍시

‘시대의 요구에 적합한 이상적 실용품은 청년양화점’이란 홍보문구의 배경 이미지로 벌판을 질주하는 기차가 그려져 있다. 1923년 12월 22일자 한 신문에 실린 양화점(洋靴店) 광고다. 기차가 조선 땅에서 처음 달리기 시작한 건 1899년. 하지만 기차가 처음부터 이 땅에서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 정부 관리들조차도 기차의 정해진 발차시간에 불만을 터뜨리며 ‘어서 출발하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기차를 도입한 이들이 보기에 ‘무질서하고 시간을 지키지 않는 조선인’은 계몽되어야 할 대상이었고, 기차는 적절하고 강력한 계몽 수단이었다.

하지만 계몽은 무자비한 것이었다. “어떤 소년이 몽둥이를 가지고 철도 위에서 놀다가 철도 위에 몽둥이를 하나 남겨 두었다. 일본인들은 소년을 붙들어서 총살시켰다. 이 범죄자는 이제 겨우 일곱 살이었다.”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이 같은 증언은 근대가 우리에게 가한 폭력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근대의 장치가 일제의 강요를 통해서만 이 땅에 정착한 것은 아니다. 소위 개화된 지식인들은 ‘문화주택’으로 지칭된 서양식 주택 속에 피아노가 있는 서양식 스위트 홈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미국 유학파로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김활란은 1921년에 ‘오락은 화평의 근본’이라는 칼럼에서 행복한 가정의 취미생활로 피아노, 화단, 풍경화 등을 꼽았다. “어느 가정에든지 때로 피아노 소리가 울려 나오거나 미릿따운 풍경화가 한 장이 걸려 있다 하면 그 가정의 단란하고 평화로운 소식은 반드시 그 한 곡조 울림과 한 폭 그림에서 얻어듣고 볼 수가 있을 것이라 합니다.”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문화주택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기대와 멀었다. 당시 신문에는 토막집 강제 이전과 철거에 대한 기사가 끊이지 않았다. “경성부에서는 계획대로 신당리 내에 산재한 토막 200여 호를 모조리 십일 내에 동소문 밖 정릉리로 철거하라고 명령하였다”는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은 1980년대를 전후한 서울 재개발과 수도권 신도시 건설 열풍으로 반복되었다. 어쩌면 역사는 진보보다는 반복을 속성으로 하는 것일까. 건국대 디자인학부 교수인 저자는 이 같은 반성적 물음을 예기치 않게 던지며 근대라는 텍스트의 현재성을 환기시킨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