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게꾼 넘을 때도 단풍은 고왔더라… ‘한국판 차마고도’로 불리는 울진 구슬령

입력 2013-11-06 17:10


이 고갯길을 내려가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지게에 소금과 고등어를 짊어진 바지게꾼과 청운의 푸른 꿈을 품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던 선비들이 오르던 구슬령에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한국판 차마고도로 불리는 구슬령 고갯길이 아흔아홉 구비를 돌고 돌아 울진에서 만나는 첫 마을. 그곳에 신선들이 놀았다는 신선계곡과 창에 찔린 사슴이 온천수로 상처를 치료했다는 백암온천이 위치하고 있다.

험준한 고갯길을 아흔아홉 구비 고갯길이라고 한다. 강원도의 대관령 옛길이 한국을 대표하는 아흔아홉 구비 고갯길이지만 실제로는 아흔아홉 구비가 못된다. 하지만 경북 울진의 구슬령 고갯길은 아흔아홉 구비가 넘는다. 고갯마루에서 백암온천까지 12㎞ 구간은 등고선보다 더 구불구불해 운전대를 잡으면 현기증이 날 정도이다.

경북 영양에서 88번 국도를 타고 산수화를 빼닮은 수비면으로 들어서면 도로와 이웃한 본신계곡의 단풍이 눈을 황홀하게 한다. 단풍색으로 채색된 본신계곡의 청류는 구슬령을 넘지 못하지만 영양의 구석구석을 에둘러 울진 왕피천으로 흐르고, 구슬령에서 시작된 청류는 남대천으로 흘러 울진 바다에서 다시 만난다.

해발 600m 높이의 구슬령은 중국의 차마고도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아찔하다. 본신계곡이 끝나고 영양군과 울진군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지판을 넘어 울진 땅으로 발을 딛는 순간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천길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V자 협곡이 나타난다. 협곡 너머 희미한 산들이 농담(濃淡)을 달리하며 중중첩첩 수묵화를 그리는 곳은 동해와 맞닿은 평해읍 일대.

울진군 온정면 외선미리에 위치한 구슬령은 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금장산(849m)의 7부 능선 고개이다. 강원도에서 뻗어 내린 태백산맥의 여맥(餘脈)이 영양과 울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로 구슬령 길목에 구지골이 있어 구지재, 도부꾼(보부상)의 애환이 서려 도부재로 불리기도 했다. 구슬령은 한문으로 표기하면 주령(珠嶺)인데 1999년 고갯마루에 ‘九珠嶺(구주령)’으로 표기된 표지석이 세워지면서 ‘구주령’으로 잘못 알려졌다.

‘울진 포구 소금 장시에서 내륙으로 왕래하는 길목은 통틀어 세 곳이었다. 남쪽으로는 온정에서 구슬령을 넘어 영양과 안동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었고, 중로에는 원남 갈면에서 고초령(高草嶺)을 넘어서 영양으로 가는 길이 있었다. 북으로는 흥부장에서 십이령을 넘어 내성과 영주로 넘어가는 길이 있었다.’(김주영 ‘객주’ 완결편 중에서)

구슬령 고갯길은 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 평해와 온정의 보부상이나 바지게꾼은 내륙으로 오가기 위해 이 고갯길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었다. 바지게는 무거운 해산물을 지고 좁은 산길을 날렵하게 다니도록 지게다리를 짧게 한 지게. 일제강점기에보부상이 퇴락하자 행상으로 입에 풀칠을 하는 바지게꾼들이 등장했다.

구슬령 고갯길은 울진 바다에서 잡은 고등어를 안동으로 운송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울진 바닷가에서 안동까지는 날랜 걸음으로도 이틀이 걸리는 거리. 장사꾼들은 고등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구슬령에서 창자를 제거하고 뱃속에 소금을 한 줌 넣어 팔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안동 간고등어이다.

울진의 소금과 고등어를 운송하던 구슬령 고갯길은 지금의 88번 국도가 아니다. 구슬령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단풍나무 사이로 깊은 협곡이 보이는 데, 이 협곡이 외선미 마을에서 구슬령 고갯마루로 올라서는 옛길로 지금은 인적이 끊겨 숲이 울창하다. 해방 전까지 외선미 마을은 주막이 열두 채나 될 정도로 번성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금장산 자락을 타고 오르는 찻길이 생기고 80년대 중반에 포장도로로 바뀌면서 나그네의 안식처 역할을 마감했다.

구슬령 고갯마루는 날씨가 맑을 때는 멀리 수평선 너머로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가 보이는 곳으로 사계절 독특한 풍경을 자랑한다. 봄에는 연둣빛 신록이 싱그럽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으로 단장한 산들이 산수화를 그린다. 가을에는 오색단풍이 곱고, 눈이 내리는 겨울에는 구슬령 일대가 열두 폭 두루마리 수묵화를 펼쳐놓은 듯 장쾌하다.

구슬령 휴게소 옆에 설치된 표지석 주변은 요즘 전망대 공사가 한창이다. 구슬령이 올해 초에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의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에 선정됐기 때문이다. 전망대 공사가 끝나면 벼랑에 뿌리를 내린 잡목이 시야를 가리지 않아 말 그대로 명소로 부상할 전망이다.

험준한 고갯길에 그럴듯한 옛이야기 하나 전해오지 않을 리 없다. 구슬령 고갯마루의 영양 땅에는 옥녀를 기리는 작은 사당과 옥녀의 무덤이 있다. 조선 인조 때 영해부사의 딸 옥녀가 영양관아를 다녀오던 중 구슬령에서 병으로 객사를 하자 주민들이 꽃다운 나이에 죽은 옥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사당을 만들었다고 한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호랑이를 비롯한 산짐승과 산적들에 얽힌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온다.

구슬령 고갯마루에서 산모롱이를 돌면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길섶에는 금강송과 어우러진 단풍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고, 맞은편의 백암산(白巖山)은 오색물감을 흩뿌린 듯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다. 해발 1004m 높이의 백암산은 하얀 구름을 머리에 인 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이 백암산의 깊고 푸른 계곡이 바로 신선계곡이다.

이른 아침 금장산 자락을 빙글빙글 돌며 하산하다보면 어느 순간 금장산과 백암산 아래에 터를 잡은 마을이 아침 안개를 솜이불 삼아 늦잠을 자는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옛날 울진의 보부상과 바지게꾼들이 구슬령을 넘기 위해 요기를 하고 목을 축이던 주막이 있던 외선미 마을이다. 88번 국도는 신선계곡으로 들어가는 선구리 마을에 진입해서도 몇 차례나 더 구비를 돈다. 그리고 백암온천으로 유명한 온정에서 비로소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울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