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탐욕과 이기심

입력 2013-11-06 17:42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은 수학적 통계의 신봉자다. ‘호모 이코노미쿠스’ 그러니까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이므로 모든 경제현상 및 위기는 통계에 기초한 알고리즘으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이에 입각해 1987년부터 2006년까지 19년간 ‘세계 경제 대통령’ 내지는 ‘마에스트로’로서 추앙받으며 세계 경제를 호령해 왔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금융시장 참여자들은 환호도 하고 탄식도 했다. 현직 시절 그를 따르는 경제학자들이 연준에 250여명이나 포진해 있을 정도였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예측에 실패했다고 일부분 인정했지만 통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는 않았다.

두번째 회고록 낸 그린스펀

그랬던 그가 최근 펴낸 두 번째 회고록 ‘지도와 영토(The Map and Territory)’에서 금융위기 예측 실패가 인간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때문이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경제모델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인간의 심리, 즉 공포와 도취, 두려움, 낙관론 등이 경제행동을 유발한다며 그간 경멸의 대상이었던 케인스 학파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숫자보다는 인간 본성에 더 끌리는 것일까. 올해로 87세인 그린스펀은 지난달 초 회고록 출간 즈음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에서 인류학과 심리학을 탐구하고 있다고 말한 점이 흥미롭다. 자신이 신주단지처럼 모셨던 통계가 말을 듣지 않은 데 대한 충격으로 새로운 영역으로 지적 여행을 떠난 듯이 보인다. 이는 책 제목에서도 엿보인다. ‘지도’가 통계에 기초한 경제모델이라면 ‘영토’는 지도에서 일반화하고 포착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심리 분야로 해석될 수 있다.

다만 실망스러운 한 가지는 그가 비이성적 인간의 심리현상 가운데 공포와 도취, 두려움과 낙관, 집단행동 등은 나열했지만 탐욕이란 단어는 외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여전히 금융위기 예측 실패를 자신만의 책임으로 돌리기 싫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는 과도하고 무분별한 차입을 얘기하면서도 불충분한 자본 즉 충격을 완화해줄 자본이 있었다면 금융위기를 피해갈 수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린스펀이 말한 야수적 충동은 위기가 임박했을 때 다수의 시장 참가자들이 느끼는 태도의 문제일 뿐이다. 위기로 몰아간 원인, 즉 소수의 기업과 금융기관이 더 많은 이익을 위해 과도한 차입을 하게 된 심리상태인 탐욕과, 거기에서 비롯된 사기성 행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욕심 제어해야 경제 안정돼

우리나라 금융시장에서도 이런 사례는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있다. 동양 사태는 빚더미로 인한 경영 실패를 은폐하기 위해 퇴직금과 전세자금을 털어 넣은 투자자들을 상대로 불완전판매 행위를 일삼은 것이 원인이다. 투자자들이 위험성을 간과한 채 기업어음(CP)을 무분별하게 매입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금융 당국도 2년 전 저축은행 사태를 경험했음에도 선제적 대응을 통해 탐욕을 막지 못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동양 사태 경고사인이 여기저기서 울리는 동안 투자자들은 동양증권의 CP 판매 유혹에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금융 당국은 이제 와서 투자자들 가운데 선의의 피해자와 투기꾼들을 솎아내겠다며 투자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정상적인 경제활동 욕구의 한 측면이다. 하지만 이기심을 제어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야수적인 탐욕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수도 없이 보아왔다. 국민행복기금이니 따뜻한 금융이니 말의 성찬 이전에 정책 당국이 뒷북만 안 쳐도 소수의 탐욕으로 인한 대다수 서민들의 피해는 막을 수 있다.

이동훈 경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