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쌀 산업] 줄어드는 쌀밥 열려가는 시장 무너지는 農心
입력 2013-11-05 18:36 수정 2013-11-05 22:00
우리나라 식생활의 근간인 쌀 산업을 향해 초대형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 쌀 관세화 유예 기간이 내년에 종료되고 2015년부터는 관세화를 통한 전면 개방이 예상된다. 쌀 소비량은 점점 줄어들지만 관세화 유예기간과 맞바꾼 의무수입물량은 쌀 시장 개방 이후에도 계속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공급 과잉을 부추길 전망이다. 정부가 추진 중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과 자유무역협정(FTA) 대상국 확대도 쌀 농가에는 달갑지 않은 소식이다.
◇내년 쌀 관세화 유예 종료=우리나라는 1994년 우루과이라운드(UR) 농업협상과 2004년 도하개발어젠다(DDA)에서 의무수입물량(MMA)을 매년 약 2만t씩 늘리는 조건으로 2014년까지 쌀 관세화를 유예했다. 2015년부터는 2014년 기준 쌀 의무수입량인 40만8700t에 대해서는 5%의 저율 관세를, 초과 수입물량에는 수백%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쌀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 관세만 내면 누구나 쌀을 수입해 판매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농민단체들은 관세화 유예기간을 연장해 쌀 시장 개방을 막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일단 국제무대에서 추가 연장을 요청할 근거가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가운데 우리나라와 함께 쌀 관세화를 유예한 필리핀은 최근 WTO 상품무역이사회 정례 회의에서 쌀 관세화 추가 연장을 위한 ‘웨이버(waiver·의무면제)’ 승인을 요청했으나 최종 합의 도출에 실패했다.
정부는 국내외 쌀값 차이가 줄어들어 높은 관세를 부담하면서까지 쌀을 수입해 판매하려는 수요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1999년 쌀을 관세화한 일본은 의무수입물량 외에 고율 관세 수입쌀이 연간 400t에 불과하고, 2003년 관세화한 대만도 고율관세 수입은 거의 없었다는 사례를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대풍작이 찾아와 수확량이 급증하고 국제 쌀 가격이 낮아지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관세를 물고 나서도 수입쌀 가격이 국산보다 낮게 형성될 경우 가공용 쌀을 중심으로 수요가 몰릴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국내 쌀 농가들의 타격은 불가피하다.
◇FTA, TPP 산 너머 산=관세화 유예 연장을 관철시키더라도 의무수입물량을 더 늘려야 하기 때문에 수급 조절이 어렵게 된다는 점도 정부가 쌀 시장 개방 쪽으로 가닥을 잡은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만에 하나 우리나라가 2015년 이후 10년간 관세화 추가 유예를 이뤄낸다 해도 쌀 의무수입량은 국내 소비량의 16%(80만t)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소비 감소추세를 감안하면 의무수입량이 국내소비량의 20%를 차지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통계청이 집계한 지난해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9.8㎏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1970년 136.4㎏에 비하면 절반을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정부는 다각적인 우리 쌀 먹기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식생활 서구화의 영향으로 쌀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다자협정인 WTO 규정에 따른 쌀 관세화와 양자협정인 FTA와의 연계성도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농민단체들은 일단 쌀 시장이 개방되면 쌀도 향후 FTA 확대 과정에서 관세철폐 협상 대상이 되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정부가 추진 중인 TPP 가입 과정에서 쌀 농가가 피해를 볼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우리나라가 TPP 본협상에 참여하려면 기존 12개 회원국 전체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개별협의 과정에서 상대국이 요구하는 개방 수준을 받아들일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특히 미국은 FTA 발효 이후에도 우리 농산물시장 개방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지난 4월 의회에 보고한 ‘2013년도 국가별 무역장벽 보고서’를 통해 외국 자본의 벼·보리 재배업, 육류도매업 참여 허용 등을 촉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식량 주권 확보 차원에서 주곡인 벼·보리를 제외한 곡물 재배업만 외국인 투자를 허용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6월 학계, 연구기관, 농민단체 등이 참여하는 ‘쌀 산업 발전포럼’을 구성했다. 쌀 관세화 유예 연장 요청 여부 등을 포함한 논의 결과를 반영해 연말까지 쌀 산업 발전 종합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