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치 절상·경상수지 흑자 계속… 한국 ‘일본형 불황’ 답습하나

입력 2013-11-05 18:19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선 경상수지 흑자 행진 속에 엔화가치가 빠르게 절상되는 이상현상이 장기간 지속됐다. 경제학적 관점에선 경상흑자로 자국 통화 가치가 오르면 수입이 늘고 수출이 줄어 경상수지가 악화되는 게 정상이다.

엔화절상과 경상흑자가 양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국제유가가 장기간 안정돼 수입증가율이 수출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엔고현상으로 일본의 수출경쟁력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출보다 수입이 더 줄어들며 엔화가치는 떨어질 줄 몰랐다. 이를 이기지 못한 일본 기업들은 TV, 자동차 등 주력 생산기지를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일본 국내 투자, 고용, 생산이 모두 위축됐다. 결국 이는 1990년대 이후 장기 저성장의 원인이 됐다.

최근 우리나라도 원화가치 절상과 경상수지 흑자가 동시에 계속되면서 ‘일본형 불황’을 답습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LG경제연구원 이창선 연구위원과 이근태 수석연구위원은 5일 ‘빨라진 원화강세 한국경제 위협한다’란 보고서에서 “현재 한국의 상황은 1980년대 후반 일본과 유사하다”며 “일본과 같은 장기 저성장의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원화가치가 절상돼도 한국의 수입이 크게 늘지 않는 데다 국제 원자재 가격이 하향 안정화 기조를 보이고 국내 기업의 해외투자 역시 급증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최근의 원화절상 추세는 한국의 실물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과거보다 더 클 것으로 전망했다. 세계적인 저성장에 한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데다 국내 수출기업도 재무상태 악화로 환율변동을 버티기 어렵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추산 결과 금융위기 이후 원화가 10% 절상되면 수출이 5%가량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특히 같은 조건에서도 섬유의복(8.5% 감소), 농축수산물(8.5% 감소) 등 뚜렷한 경쟁우위를 갖지 못한 산업에 충격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원·달러 환율이 내년 초 1000원대 초반까지 하락할 수 있다며 정책 당국이 장기적인 경상흑자 축소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제적인 갈등을 가져오지 않는 선에서 외환시장에 개입하고, 거시건전성 규제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한장희 기자 jh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