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용신] 쫀득하고 바스락거린다

입력 2013-11-05 17:49


얼굴이 당겨온다. 공기 중에 물기가 사라져가는 것을 그대로 얼굴이 느낀다. 스킨과 수분크림을 충분히 발라주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하자. 그리고 하나 더. 건조함의 진격에 당하고만 있기 원통하다면 수동적인 자세를 버리고 더 공격적일 필요가 있다. 세상에 모든 물기 있는 것들을 가을볕에 내다 말리자. 고슬고슬하고 꼬들꼬들하게 내다 말리자.

입맛 없는 날들마다 물에 만 밥에 올려놓을 짭짤 새콤하고 아삭거리는 것들을 준비하듯, 겨울을 앞두고는 김 솔솔 피어오르는 윤기 나는 밥 위에 얹을 나물을 들기름에 달달 볶아 말릴 일이다. 오독거리며 씹는 맛도 좀 있고 물기를 바싹 말린 바람 냄새도 배어 나오고 계절을 넘긴 묵은 향도 좋다. 무언가를 말리기 시작하기는 이미 고추부터였다. 초가을부터 골목이나 빈터마다 레드카펫처럼 깔려 바닥에서 뒹굴며 몸을 말리던 것이 고추였다.

고추 말리기를 끝낸 할머니들은 호박이며 가지며 깻잎, 고사리, 버섯, 또 한가득 가지고 나와 살짝 비켜선 은근한 가을 햇볕 아래 주르륵 늘어놓는다. 계절이 주는 것들을 한 줌도 버리지 않고 죄다 활용하는 할머니들의 알뜰함에 놀란다. 며칠 전에는 고구마를 썰어 살짝 쪄 말려 놓으면 깊어가는 가을 밤 영양 간식으로 그만이라는 사연이 들어왔다. 사과를 샀는데 당도가 떨어져 맛이 없기에 얇게 썰어 말려놨더니 달달하고 쫀득해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지난해 가을인가엔 우엉을 채 썰어 말린 다음 살짝 볶아서 우엉차를 보내준 분도 있었고 표고버섯을 말려 보내준 분도 계셨다. 과일과 채소를 말리면 수분이 빠지면서 영양밀도가 높아진다. 말린 무는 말리기 전보다 칼슘이 10배 이상 되고 말린 표고는 단백질과 비타민D가 16배 이상 증가했으며 말린 사과는 말리기 전에 비해 칼슘과 비타민C가 5배 증가했다는 보고도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저장된 말린 음식으로 겨울철에 부족한 비타민과 무기질, 식이섬유를 보충했던 이유가 다 여기 있었다.

채소와 과일을 말리기에는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전 요즘이 딱 적기다. 나는 가을무를 사다가 채 썰어 말려놓고 꾸둑꾸둑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살짝 볶아 무차를 해 먹을 테다. 내 얼굴 당기고 퍼석해질 때, 세상이 건조해서 좋아질 것들은 뭐가 있나 그런 생각을 했던 사람들은 나물을 말리고 과일을 말리고 이불을 말리고 습한 마음을 말렸다. 아, 쫀득하고 바스락거리는 가을이다.

김용신(CBS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