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향기’ 이영준 상임이사, 165만명에 매일 ‘향기 메일’ 띄워요
입력 2013-11-05 17:07 수정 2013-11-05 22:16
이메일을 열어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메일함에는 늘 ‘보험 들라’ ‘한번 만나자’ 등 쓸데없는 메일들이 그득해 얼굴을 찌푸리게 한다. 문화포털사이트 ‘사색의향기’를 운영하는 사색의향기문화원 이영준(54) 상임이사는 “깊어가는 가을날 마음을 따스하게 해줄 이메일을 받고 싶다면 ‘향기 가족’이 되시라”고 권한다. ‘행복한 문화 나눔터’를 표방하고 있는 사색의향기문화원의 홈페이지(www.culppy.org)에서 회원 가입을 하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명언, 소설이나 시의 한 구절, 아름다운 세상을 담은 사진 등을 소개하는 ‘사색의향기’를 자신과 이웃들에게 선물할 수 있단다.
165만8200여 명에게 ‘사색의향기’를 메일로 보내고 있는 이 이사를 지난달 31일 서울 방배동 사색의향기문화원에서 만났다. 그는 “‘사색의향기’는 실패에서 피어난 꽃”이라며 하하 웃었다.
공대 출신인 이씨는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30대에 중소기업 부사장으로 스카우트됐다. 마흔이 되던 해 창업을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납품하던 대기업이 부도가 나면서 이씨도 망했다. 이씨는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는 변명을 담아 지인 1600여 명에게 메일을 보냈다. 2004년 1월이었다. 이후 사업이 부도가 났으니 힘들 수밖에 없는 그였지만 혼자 빙그레 웃는 일이 잦았다. 메일을 보낸 다음 날부터 꾸준히 들어오는 답장 덕분이었다.
“격려 메일이 1만여 통이나 들어왔어요. ‘당신이 사줬던 책이 도움이 됐다’는 내용이 꽤 많았습니다.”
이씨는 한 10년 동안 4000여권의 책을 지인들에게 선물했었다. ‘책만큼 투자 대비 가치가 있는 선물이 드물다’는 나름의 셈법에 따른 것이었다. 응답 메일을 받은 그는 돈이 없으니 책을 사서 보낼 수는 없고, 좋은 글이라도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해 2월부터 3개월간 준비했습니다. 혼자 주먹구구식으로 해선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아 조직을 구성했지요.” 그는 ‘가벼운 온라인 문화를 향기 나는, 좋은 문화로 바꾸는 데 힘을 보태 달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2004년 5월 4일 뜻을 같이하는 15명이 발기인 총회를 하고 첫 공식 메일을 보냈다.
“좋은 글을 엄마가 딸에게, 친구에게 선물하는 형식을 취했습니다.” 짧은 글을 보내던 이씨는 슬슬 욕심이 났다. 예전처럼 책을 보내고 싶어진 그는 2005년 ‘좋은 책 이벤트’를 시작했다. ‘댓글을 달면 선착순으로 책 50권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순식간에 200여 개의 댓글이 달려 추첨을 해야 했다.
“1만여 명으로 시작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회원이 7만여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모두 이문열씨 덕분이죠. 하하…”
좋은 책 이벤트에 이문열의 ‘신들메를 고쳐 매며’를 올렸을 때 마침 그의 친일발언이 터진 것. 홈페이지에 수십만 명이 몰려들었다. 그중 5만여 명이 회원가입을 했고, 친일단체로 오인한 2만여 명은 탈퇴했다. 결국 회원은 5만3000여 명으로 불어 자체 웹 솔루션을 구축해야 했다.
“비용이 제법 들었지요. 제 주머니와 이사들의 쌈짓돈으로 버텼습니다.”
주머니가 가벼워질수록 마음의 곳간은 풍요로워졌다. “사색의향기’ 메일을 손님들에게 선물할 수 있어 기쁘다”는 식당 사장님도 있고, “사업이 망해 마지막을 떠올리다 ‘사색의향기’를 읽고 생각을 고쳤다”는 50대 가장도 있었다. 물론 “이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는 비아냥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조차도 관심으로 여겨 끌어안았다.
“2006년 문학기행을 시작했고, 향기작가회, 마라톤동호회도 결성했습니다. 2007년에는 좋은 공연을 소개하는 공연이벤트를 시작했고, 향기서평단도 만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행복한 도보여행, 힐링캠프 등을 개최하고 있다. 범죄자를 부모로 둔 청소년들과 문화 공연 관람을 함께하는 ‘사랑의 나누미’ 활동도 하고 있다.
처음 메일을 보낼 때 회원들이 좋은 책을 돌려 읽는 북클럽 정도를 꿈꿨다는 그는 사색의 향기가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160여만 명의 대가족의 둥지가 된 지금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연간 3억 원 이상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자체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기반만 마련되면 회원들에게 돌려드릴 생각입니다.” 이 이사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회비 납부 등 다방면으로 재정 마련 방법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10년 가까이 사랑과 정성을 쏟은 향기 가족을 떠날 채비를 슬슬 하는 그는 요즘 부쩍 딴 생각을 많이 한단다. 베이비붐 세대들의 행복한 귀촌 마을, 이것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새로운 꿈이다.
김혜림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