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근 목사의 시편] 스마트폰 시대와 용기

입력 2013-11-04 17:34 수정 2013-11-04 21:53


오래전 미국 뉴욕의 한 전철역에서 한인 남성이 정신병자에 떠밀려 지하철 플랫폼으로 떨어졌는데 구해주는 사람이 없어 열차에 치여 숨진 사건이 있었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기까지 60초란 시간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구경만 하고 스마트폰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구하겠지’라며 방관했다. 더 기막힌 것은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가 구조는 하지 않고 사진만 촬영했다는 사실이다. 뉴욕 포스트는 이 사고 소식을 사진과 함께 신문 1면에 실으면서 ‘이 사람이 곧 죽는다’란 제목을 달았다. 그로 인해 여론이 들끓었고 시민들은 분개했다.

이런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방관자 효과라고 한다. 요즘은 이 방관자 효과가 더 많이 발생한다. 지하철 안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폭행을 당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스마트폰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거나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다. 스마트폰 외에는 관심이 없다. 한 번은 카페에 갔는데 젊은 연인이 커피를 시켜놓고 한참동안 자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대화가 되지 않았다. 사람은 서로 도와주며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스마트폰이 인간관계를 단절시킨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공동체의 가치관, 윤리관에 개입하지 않는 개인주의 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오래 전에 자녀들을 데리고 버지니아 주에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 안의 케네디 대통령의 묘지에 갔다. 그때 케네디 대통령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케네디 대통령은 “인간은 역사 앞에 스스로 세 가지를 물어봐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 앞에 용기 있게 살았는가. 둘째, 역사 앞에 현명하게 살았는가. 셋째, 역사 앞에 후회 없이 살았는가.

인간은 도덕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고, 윤리가 있고, 규범이 있는 것이다. 할 일이 있고, 하지 못할 일이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양심이 있다.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그리고 속이지 않는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번은 미국 신문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미국 LA 버나파크’에 사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니처 가족은 직장을 잃고 시부모님 댁에 얹혀살았다. 1993년 2월 니처씨의 부인 파울린 여사가 쇼핑센터에서 윈도쇼핑을 하다가 지갑을 주웠다. 그 지갑 속에는 2000달러 상당의 돈이 들어 있었다. 쓰고 싶은 유혹이 다가왔지만 근처 파출소에 가서 신고했다. 파출소에서는 운전면허증을 보고 주인에게 연락해서 찾아주었는데, 지갑 주인은 파울린 여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단 한 푼도 사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선행소식을 들은 TV방송국에서 니처씨 가족을 소개하자 각계각층에서 성금을 보내와 10만 달러를 받게 되었고, 직장도 알선 받게 되었다. 이렇게 착한 사람은 우리 회사가 채용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도덕적 용기가 있는 곳에 축복이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들이 너무 무기력해져 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에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고, 사회적 용기가 필요하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4)

<여의도순복음분당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