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윤필교] 걷기 좋은 날
입력 2013-11-03 18:27
눈부시게 맑은 가을날, 상암동 하늘공원 서울억새축제에 다녀왔다. 도심 속에서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원을 들어서니 쪽빛 하늘 아래 하얗게 빛나는 은빛 억새 물결이 바람에 일렁이며 가을 정취를 한껏 자아냈다. 연인, 친구, 가족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억새밭을 누비는 풍경이 참 여유로워 보였다. 전망대에 오르니 사랑의 자물쇠들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고, 멀리 원두막과 하얀 억새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길을 걷다 보니 몇 해 전 가을, 남산걷기대회에 참가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장거리 마라톤을 즐기던 지인의 주선으로 40∼50대 여성 열다섯 명이 남산에 모였다. 우리는 각자 이름 대신 별칭 하나를 가슴에 써 붙이고 처음 만난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눴다. 준비운동을 한 뒤 가볍게 뛰는 팀과 걷는 팀으로 나눴는데, 나는 걷는 팀에 들어갔다.
산 중턱부터 정상까지 왕복 10㎞를 걷는 일은 초보에게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정상에 도착할 즈음 왼발에 물집이 잡혔다. 하지만 완주해 냈다는 기쁨은 더없이 컸다. 우리는 산을 내려와 찻집에 앉아 그날 걸으면서 느낀 점을 도화지에 그린 뒤 소감을 나눴다. 매일 두 시간씩 7년째 걷고 있다는 한 참가자는 “걷기는 나에게 극기이고, 성실성이다”라고 하면서 나름의 건강 유지법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때 걷기 매력에 동화되어 날마다 출근할 때 30분간 걸어가서 버스를 타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가는 도중에 월드컵공원을 지나는데, 사계절 변화하는 공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일상의 작은 기쁨이다. 갓 돋아난 새순과 철따라 피는 꽃들, 누군가 풀숲에 소복이 모아놓은 솔방울을 렌즈에 담는다. 열매 맺은 나무들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향긋한 모과를 발견하기도 한다. 무심코 걸을 때 덤덤했던 그 나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피톤치드(Phytoncide)를 내뿜는 나무 사이를 지나가면 몸과 마음이 힐링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하루를 축복받고 싶은 사람은 걸으라”고 했다. 걷기 좋은 날, 혼자 걷기 심심할 때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걸어보자. 강아지와 함께 걷는 펫 워킹, 시를 애송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면서 걷는 이색적인 동호회도 있다. 걷기 위해 굳이 올레길이나 먼 산에 갈 필요가 없다. 집 앞 골목길이나 앞동산도 좋다.
윤필교(기록문화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