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홍하상] 네덜란드인의 세계제패 정신

입력 2013-11-03 18:26


네덜란드의 선장이자 지도제작자, 모험가였던 상인 빌렘 바렌츠(1550∼1597)는 1596년 세 번째 북극항로 개설에 나선다. 이미 두 번의 항로 개설에 실패했으므로 이번에는 어느 누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두 척의 작은 배를 구입하여 다시 항해에 나섰다. 이번에는 장비도 변변치 않았다. 단지 1개월 정도를 버틸 수 있는 빵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대신 그 두 척의 배에는 소금에 절인 쇠고기, 버터, 치즈, 빵, 호밀, 콩, 밀가루, 기름, 식초, 겨자, 맥주, 와인, 훈제베이컨, 햄, 생선, 모포, 옷 등 러시아 시베리아의 고객들에게 배달할 무역상품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들은 1596년 5월 10일에 출발, 6월 9일에는 곰 섬을 발견했다. 6월 17일에는 스피츠베르겐이라는 섬을 발견했다. 그들은 북극해 인근의 작은 무인도들을 지도에 표시하면서 전진했다. 즉 네덜란드의 국토를 넓히기 위한 선발대였던 것이다.

굶어죽어도 고객상품은 손 안대

그들은 시베리아의 고객들에게 물자를 가져다주기 위해 항해를 계속하던 도중 노바야 젤라 섬 근처에서 빙하에 갇히게 된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간신히 그 섬에 상륙, 유빙이 더 이상 흘러오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유빙은 멈추지 않았고, 어떤 배도 근처를 지나가지 않았다. 이윽고 식량이 떨어졌고 그들은 여우와 북극곰을 사냥하면서 허기를 달랬다. 그러나 북극곰도 잡히지 않아 17명의 선원 중 8명이 굶어죽었다. 그 사이 다행히 빙하가 녹아 그들은 배를 돌려 네덜란드로 향했다. 배가 항해를 다시 시작한 지 1주일 만인 1597년 6월 20일 선장 바렌츠도 먹지 못해 사망했다.

그들은 그 후 러시아 선박에 구조돼 4개월 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 돌아가게 된다. 그들의 조사를 맡았던 네덜란드 공무원들은 뜻밖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객들에게 전달할 식량과 모포와 옷들을 단 한 개도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식량의 일부를 먹었더라면 그들은 사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굶어 죽을망정 화물은 손대면 안 된다는 상인정신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네덜란드 국민들은 슬퍼하면서도 그들의 상인정신에 감탄했다. 이 이야기는 훗날 바렌츠의 승무원에 의해 책으로 출판되었다.

기술자들과 기업인 우대해야

이처럼 네덜란드 상인들은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불사하는 뛰어난 상인정신을 갖고 있고, 바렌츠 선장의 얼굴은 지금도 10유로짜리 동전에 새겨져 있다. 이것이 네덜란드의 상인정신이다. 이러한 상인정신이 더욱 발전해 네덜란드인들은 아시아와의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호주 남쪽의 섬, 태즈메이니아를 발견한 사람도 네덜란드인 타스만이었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100년간 약 2500만t에 달하는 아시아의 향료, 커피, 도자기를 유럽으로 내다팔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들은 특히 일본의 도자기를 주목하고, 1609년 일본 최서단 작은 섬인 히라도에 네덜란드 무역센터를 개설했다. 그들은 일본 도자기를 100년간 유럽에 내다팔아 규슈 나베시마 가문에 680t의 금을 대금으로 지불했고, 자신들도 막대한 부를 쌓았다. 동인도 회사의 투자자들에게도 연간 최대 40%, 적어도 18%의 이익을 배당했다. 당시 유럽 최고의 이익 배당이었다.

당시 동인도 회사가 실어간 도자기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이삼평과 그의 수하들이었다, 조선은 도공을 천대했으나 일본은 도공을 우대하면서 그들이 만든 도자기를 내다팔아 국가를 일으켰다. 이 시각 차이가 훗날 한·일 두 나라의 엄청난 국력 차이를 가져왔다. 조선은 멸망의 길로 갔고,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했다. 중국과 일본, 두 나라의 전운이 감돈다. 지금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바로 기술자들과 기업인들을 우대하는 것이다.

홍하상 (논픽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