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수진 (4) 10일간의 첫 항해… 초보선원들 배멀미와 전쟁을
입력 2013-11-03 17:26
싱가포르까지 열흘간의 첫 항해는 선교사 모두를 배 타는 재미에 빠지게 했다. 돌고래가 배와 헤엄쳤고 칠흑 같은 밤에 레이더에 의존해 항해하는 것이 신기했다. 망망대해에서 만난 상선을 무전기로 교신할 때는 즐거웠고 식당 봉사자 전원이 뱃멀미를 하는 통에 형제들이 급히 만든 음식을 먹을 때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바다 위의 10일은 너무 길었다.
싱가포르에 도착해 태국과 말레이시아에 전도팀을 파송했다. 배는 다시 인도네시아 바탐섬으로 기수를 돌렸다. 바탐섬에 도착하자 싱가포르 출신 두 자매와 말레이시아 출신 봉사자 5명이 배에 올라 한나호 공동체의 일원이 됐다. 그때부터 한나호의 공식 언어는 영어가 됐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한나호가 도착할 때면 어김없이 종교경찰과 출입국관리소의 감시 대상이 됐다. 나는 아침마다 호출을 당했다. 그리고는 똑같은 질문을 들어야 했다. “뭐하는 배냐” “왜 들어온 거냐.” 심지어 “당신은 선장도 아닌데 왜 사람들이 인사를 하느냐”는 질문도 있었다. 스트레스와 긴장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하루 빨리 항구를 떠나고 싶었다.
하루는 존 라시라는 출입국관리소 직원에게 신문(?)을 당했다. 똑같은 질문에 싫증이 났던 나는 그의 이름을 듣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대답만 하던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당신 이름은 존이냐.” 그는 약간 놀라더니 “증조부가 크리스천이어서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증조부를 기억하냐”고 물었고 그렇게 우리의 대화는 시작됐다.
존에 따르면 그는 인도네시아의 국립대 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볼 만한 책도 없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분위기도 훈훈해졌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설탕이 듬뿍 들어간 커피와 샌드위치까지 직접 내놓았고 관심을 보였다. 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존, 한 마디 해도 되겠는가. 이 참에 확실한 무슬림이 되든지, 아니면 증조부처럼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어떨까.”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나는 좀 더 그를 설득시키기 위해 전도지를 꺼내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런데 미화 1달러짜리가 나왔다.
지폐에 씌어진 ‘IN GOD WE TRUST’를 보여줬고 기독교와 복음을 설명했다. 얼마의 침묵이 이어졌다. 불안했다. 이러다 쫓겨나면 어떻게 하나. 하지만 존은 웃으며 일어났고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요청했다. 그리고는 30명 선원의 여권을 돌려주면서 “싱가포르까지 안전한 항해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힘껏 포옹했다.
바로 그날 존 라시는 다음 항구인 탄중피낭의 출입국관리소장에게 ‘한나호는 기독교 선교선이니 입항과 동시에 추방시키라’는 공식서한을 보냈다. 이후 존 라시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한나호의 30명 형제자매는 수개월간 기도했다.
한나호는 탄중피낭으로 가지 않고 싱가포르를 거쳐 동말레이시아의 두 항구 도시로 향했다. 교회들을 찾아 간증과 선교집회를 열었고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순수 한국인들의 배였던 한나호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사람이 추가되면서 아시아의 선교선으로 변신했다.
한나호는 마닐라에서 교회 개척을 위해 활동하다 피나투보 화산 폭발의 충격으로 배가 뜨면서 부두에 부딪치는 바람에 우현에 심각한 손상을 입고 선박수리를 위해 한국으로 잠시 들어오게 됐다.
이후 사이판으로 재출항했고 전도가 가장 어렵다는 팔라우공화국으로 향했다. 팔라우공화국은 그동안 방문했던 나라들과는 환경이 판이했다. 너무 생소해 정말 선교지에 온 것 같았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