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31) 독일에 흐르는 경건한 영성
입력 2013-11-03 17:19
獨 다름슈타트 개신교 여성공동체 ‘마리아자매회’를 가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로 40여분 걸리는 다름슈타트에는 여성 개신교 공동체인 마리아자매회(Marienschwestern) 독일 본원이 있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20여개국에서 온 200여명의 ‘자매’들이 가나안(Kanaan)으로 불리는 마리아자매회 독일 본원에서 공동생활하고 있다. 가나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정문 입구에 새겨진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마태복음 4장 17절 말씀이다.
‘회개’는 마리아자매회의 설립 동기이자 근거였다. 마리아자매회는 회개로 시작된 영적 공동체였다. 많은 독일 도시와 마찬가지로 다름슈타트는 2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깊게 파인 도시. 1944년 9월 11일 연합군은 무기생산 공업도시인 다름슈타트에 대공습을 가했다. 도시는 폐허가 됐으며 무려 1만2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난 경건한 크리스천인 바실레아 슐링크(Basilea Schlink·1904∼2001)는 독일의 국가적인 죄, 특히 유대인 학살에 대한 민족적 죄악을 회개하기 위해 1947년 에리카 마다우스(Erika Madauss)와 함께 마리아자매회를 설립했다.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를 통해 용서받아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신 가운데 시작된 믿음의 공동체였다.
공동체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깃발이 세워져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의 도움으로만 지어지다.’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야말로 마리아자매회를 65년 동안 존재케 만든 동력이었다. 자매회는 지난 시절 필요한 모든 것을 기도를 통해 공급받았다. 절대적인 ‘믿음 생활(Faith Life)’의 원칙을 고수했다. ‘주시면 먹고, 주시지 않으면 굶는다’는 청빈의 삶을 지켰다.
독일 본원인 가나안은 상당히 넓은 부지에 예배당 등 아름다운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 가나안 자체가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다. 1949년 슐링크는 하나님이 거하실 예배당을 지어야겠다는 열망을 갖게 됐다. 오직 마음만 있었을 뿐이었다. 땅도 없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기적적으로 땅을 기증받게 되었다. 전체 건축 비용이 당시 환율로 미화 6만2000달러 정도 드는 대형 프로젝트였지만 그들 수중에는 10달러밖에 없었다. 그러나 슐링크를 비롯한 자매회 멤버들은 기도했고, 하나님은 응답했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재정이 충당됐다. 자매회가 독일 본원의 이름을 가나안으로 지은 이유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해 들어가게 하신 땅이기 때문이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조용한 분위기 속에 몇 명의 여성 수도사들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하나같이 맑은 얼굴이었다. 80세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인과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수도사들 모두 세속의 때라곤 조금도 묻어 있지 않은 순진무구한 얼굴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과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모습만으로도 그곳에서의 삶이 연상되었다. 거기에는 30년 넘게 정회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두 명의 한국인 여성도 있었다. 그들도 맑았다.
가나안 내에서 만난 여성 수도사들은 한결같이 이름을 밝히려 하지 않았다. 세상에는 무명(無名)하고 하나님께는 발견되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여성 수도사들은 이방인들과 ‘서늘한 객관성’을 지키려 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환대의 분위기가 있었다.
이들에게 기도는 삶이다. 매일 정오마다 세계를 위한 기도를, 오후 3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고난 예배를 드린다. 세계를 위해 기도할 때에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도 빼놓지 않는다. 회개를 위해 시작된 공동체답게 예배마다 회개의 기도를 드린다. A씨(무명의 삶을 바라는 그들의 소망대로 이니셜을 사용한다)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경험하는 가장 큰 비결이 회개라는 사실에는 둔감한 것 같습니다. 회개는 일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녀는 “회개야말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차 관문”이라면서 “매일 아침 회개할 때마다 ‘그의 성실하심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성경 말씀을 경험하게 된다”고 언급했다.
가나안 안에는 ‘승리의 길’이라는 곳이 있다. 성경 말씀이 새겨진 돌비석들이 거기에 있다. 방문객들은 석비에 새겨진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이사야 30장 21절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지금 우리 시대는 길을 잃은 채 헤매고 있다. 바른 길을 찾지 못한 가운데 모두들 저마다의 길로 가고 있다. 이 시대에 “너희는 이 길로 가라”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해서는 먼저 길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조명 아래서 자신의 길을 발견한 사람만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 그 길을 발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철저한 회개라는 것을 마리아자매회 사람들은 알려주고 있다.
가나안의 모든 사람은 매일 정해진 노동을 한다. 그들은 방송 및 문서 선교, 문화 사역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있다. 문서 활동은 상당히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슐링크가 지은 100여권의 책은 60여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누구나 방문이 가능하며 주일 예배에는 외부인들도 참석할 수 있다. 기자가 참석한 주일 예배에는 루터교 목회자가 와서 말씀을 전했다. 전체적으로 경건함이 묻어나는 예배였다. 인근 만하임에서 첼리스트로 활동하는 미리엄 버틀러씨는 “가끔 영혼이 황폐해진다고 느껴질 때마다 가나안에 온다”면서 “이곳에 오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명확해진다”고 말했다.
가나안에 머물고 있는 남성들도 있다. 물론 정회원은 아니고 ‘헬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도우미다. 이들도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을 위해 가나안에 왔다. 2006년부터 머물고 있는 디미트리라는 56세의 그리스인에게 “답답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전혀 답답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남은 삶은 오직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발견되는 데만 사용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 수도사 B씨는 “가나안이라는 제한된 공간만이 아니라 모든 곳이 하나님의 뜻이 통과되는 통로”라면서 “거친 세속의 사무실 속에서 영성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했다.
잠시 가나안에 머물렀지만 그곳에 흐르는 깊은 영성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나안은 기도와 묵상, 화해와 사랑, 기쁨과 평화의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 수도사들의 모습 자체가 말씀이었고 교훈이었다. 많은 말보다 침묵과 은은한 미소가 더 큰 힘을 갖는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지금 한국 사회와 교회에 필요한 것은 맑고 착한 영성이며 경건함이다. 풍요와 스피드의 세계에서 잃어버린 청빈과 느림의 영성이 필요하다. 임재의 감동이 약해지고 종교성에 함몰되었을 때마다 사막으로 나갔던 초기 크리스천들이 지녔던 사막의 영성이 우리에게 절실하다.
가나안에서 또한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독일이 왜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독일에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영성이 흐르고 있다. 비록 외면적으로는 잘 보이지 않더라도 독일인과 독일문화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기독교 정신은 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지난 역사적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게 만들고 있다. 기독교 정신의 유무, 그것이 일본과 독일의 차이를 만든 근원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다름슈타트=글·사진 이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 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