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진짜 ‘가난병’
입력 2013-11-01 17:35
인류학자 루이스 부부가 멕시코시티의 빈민가인 베신다드에서 한 가족의 생애를 4년에 걸쳐 생생히 기록한 저서 ‘산체스네 아이들’에는 12세 소녀 과달루페 얘기가 나온다. 과달루페는 초경이 가난 때문에 생긴 것으로 여기고 있다. 실제로 이 소녀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건강이 좋지 않으며 사망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연구 결과들이 종종 발표되곤 했다.
미국 클리블랜드 진료소에서 장기간 추적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나이 및 성별, 흡연 여부 등의 요소를 모두 고려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사망할 가능성이 배 이상 높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가난할수록 비만인 사람도 더 많다. 그 원인은 ‘에너지 불확실성’이란 이론을 접목한 실험에서 밝혀졌다. ‘역경’이나 ‘인내’ 등의 어려운 상황을 연상시키는 단어에 노출된 사람들의 경우 고칼로리 음식을 더 많이 먹게 된다는 것이다. 굶주릴 수 있는 어려운 상황이 다가온다고 느끼면 더 많은 칼로리를 비축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게 바로 에너지 불확실성이다.
그런데 가난할 경우 뇌의 인지능력마저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최근에 발표됐다.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실시한 이 연구 결과에 의하면 자동차 수리비용이 저렴할 때는 인지능력이 모두 좋았지만 자동차 수리비용이 비쌀 경우 부유층은 변함이 없으나 빈곤층은 인지 테스트에서 악화된 결과를 보인다는 것. 즉, 돈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인지능력이 떨어져 오히려 재정적인 피해를 일으키는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는 의미다.
‘가난하면 뜻도 짧다’는 중국 속담처럼 가난하면 건강과 수명, 그리고 판단력도 짧아지는 셈이다. 하지만 프린스턴대 연구진이 실험 대상을 바꾸어 똑같이 실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뇌의 인지기능 저하는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빈곤한 상황이 문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실험 대상은 바로 수입의 대부분을 사탕수수에 의존하고 있는 인도의 농부들. 사탕수수 수확은 1년에 한 번 있기에 수확 이후엔 부유하지만 수확 이전엔 가난하다. 인도 농부들은 부유할 때 인지 테스트에 문제가 없었지만 가난할 땐 도시의 빈곤층처럼 인지능력 저하를 보였다. 즉, 뇌의 인지기능 저하는 가난 때문이 아니라 가난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로 인해 찾아온다고 봐야 한다. 빈곤층의 건강과 사망률, 비만 문제의 정답도 바로 거기에 숨어 있지 않을까.
이성규 (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