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서윤경] 당신의 색은 무엇입니까
입력 2013-11-01 17:35
비 냄새….
“아침, 가랑비가 지표에 있는 모든 것을 차갑게 적시고 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방금 전 막 끝낸 소설의 한 장을 생각하고 있다. 비 내리는 아침에 문장을 쓰면, 무슨 영문에선지 그것은 비 내리는 아침 같은 문장이 되고 만다. 나중에 아무리 손질을 해도 그 문장에서 비 내음을 지울 수가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책 ‘먼 북소리’에서 그리스의 미코노스를 떠난 직후 한 문예지를 위해 쓴 글을 소개한 것이다. 이 글을 소개하기 전 그는 자신의 글엔 집필할 당시의 날씨와 환경이 묻어난다고 고백을 했다. 그리고 미코노스에서 쓴 자신의 소설에서 비 냄새가 난다고 했다.
덕분에 그의 고백을 확인한 후 나는 그의 소설과 수필집 속에서 날씨를 유추하는 버릇이 생겼다. 사람마다 오감 중 유독 민감한 부분이 있다. 후각과 청각, 미각이 둔한 나도 민감한 것이 있다. 시각이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남기고 싶은 기억을 색으로 연관짓는 버릇이 있었다.
특히 홀로 여행길에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기억해야 할 여행지의 추억을 색과 연결짓곤 했다. 여행을 끝내고 기억을 남기기 위해 일기를 가장한 글을 쓸 때면 어김없이 그 여행지에 색을 덧입혔다. 야생초 가득했던 강원도 곰배령은 파스텔 톤 연보라색이었고, 구름이 뒤덮여 있던 제주도 가파도는 순백으로 기록됐다. 해외여행지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은 빨간색, 미국은 황토색, 그리고 이탈리아는 짙은 남색. 물론 자신만의 경험치를 토대로 한 색이라 정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여러분이 생각하는 네덜란드의 색은 무엇인가. 빛의 화가로 불리는 반 고흐의 나라, 튤립의 나라, 오렌지 군단으로 불리는 나라…. 일반적으로 주황색이나 노란색을 떠올릴 듯하다. 아쉽게도 내 기억에 칠해진 네덜란드는 달랐다.
“2013년 10월 16일. 반 고흐의 짙은 코발트빛 밤하늘을 만나러 떠난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30분이나 걸려 도착한 아른헴 역. 그곳에서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비로소 오텔로 지역에 있는 호헤벨루베 국립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야생동물이 출몰하는 숲 속을 자전거로 달렸다. 평소 아름답기로 유명한 공원이었지만 먹구름 잔뜩 낀 하늘 덕에 이날만큼은 을씨년스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했다.
드디어 숨겨둔 보물을 토해내듯 미술관이 나타났다. 소도시 크기의 거대한 공원 안에 자리한 크뢸러 뮐러 미술관. 그곳엔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인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었다. 이 작품은 1935년 크뢸러 뮐러 부인이 나라에 기증한 수백 점의 컬렉션 중 일부였다.
색채의 마술사인 고흐는 예기치 않은 색을 예기치 않은 곳에 썼다. 그런데 그게 참 절묘했다. 얼굴에 푸른색을 써도, 밤하늘에 코발트블루를 써도 어색하지 않았다. 물감 살 돈을 아끼기 위해 털실을 꼬아 색을 조합했음에도 그는 찬란하게 색을 구현했다.
미술관을 나오자 호헤벨루베 공원은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고흐의 그림 속으로 들어온 듯. 짙은 녹음에 어울리지 않는 안개가 공원의 신비함을 더해주는 듯했다.”
“10월 18일.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이 오후 6시가 되자 클럽으로 바뀌었다. 1층엔 DJ가 턴테이블 앞에서 음악을 틀고 있었고 소파에 앉은 관람객들은 한켠에서 팔고 있는 음료를 구입해 마셨다. 순간 2층의 하얀 벽에 고흐의 그림이 영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클럽 음악과 함께 고흐의 황금빛 해바라기가 벽면에 넘실댔고 하얀색 배꽃잎이 날아다녔다.
1880년대 그림들이 21세기 음악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삭막한 박물관’의 화려한 변신은 금요일 밤마다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얼마 전 우기로 접어든 네덜란드로 때늦은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적은 기록이다. 1주일 중 나흘간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공원, 비 내리는 박물관, 비 내리는 왕궁, 그리고 비 내리는 운하.
아마 그곳에서 하루키가 글을 썼다면 그의 글에선 또 다시 비 냄새가 났을 거다. 내 글에 덧입혀진 네덜란드의 색은 회색이었다. 누군가 네덜란드에 어울리지 않는 색이라 반론한다면 밝게 빛나는 ‘회색빛’이라 말하고 싶다. 다른 원색들이 자기 색을 발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그런 회색.
도시에 회색빛을 입힌 비에도 문화의 가치와 자유를 존중하는 네덜란드는 생동감이 넘쳤다. 마치 ‘밤의 카페 테라스’ 속 황금색 테라스 조명이 그토록 환하게 느껴지는 것도 밤하늘이 코발트블루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은 어떤 색으로 기록될까.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은 한국을 IT 강국, 역동적인 나라, 한옥과 빌딩이 조화를 이루는 고혹적인 나라로 기억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대한민국은 색깔 때문에 시끄럽다. 자세히 말하면 사전에도 없는 ‘색깔론’ 때문이다. 색깔론이라는 결론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에 내가 덧입히고 싶은 색깔이 있다. 신비로움을 간직한 보라색이다. 보라색은 빨강과 파랑을 섞어야 나온다.
서윤경 산업부 차장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