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세계적인 미술관의 조건
입력 2013-11-01 17:35
퀴즈 하나.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으로 구입한 것은? 미국 출신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62)의 영상작품 ‘트리스탄 프로젝트(The Tristan Project)’다. 2010년 15억원을 들여 구입했다. ‘현대미술의 영상시인’으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에 대한 영적 이미지를 느림의 미학을 통해 사유토록 한다.
퀴즈 둘.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해 미술품 구입 예산은 얼마? 비올라의 작품에 15억원을 쏟았으니 전체적으로 엄청난 액수라고 짐작한다면 오산이다. 올해 구입비는 고작 31억원이다. 내년에는 5억원을 보태 36억원으로 늘릴 예정이다. 하지만 경매를 통해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박수근 화백의 ‘빨래터’ 같은 작품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예산이다.
퀴즈 셋.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총 몇 점일까? 7000여점으로 1만점도 채 안 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얼마 전 열린 국정감사에서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은 15만여점을, 영국 테이트모던과 프랑스 퐁피두센터는 각각 7만여점의 소장품을 확보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7000여점은 턱없이 적은 수치다.
미술계 안팎의 오랜 숙원이었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오는 13일 드디어 개관한다. 서울 소격동 옛 국군기무사령부 자리에 미술관 조성 발표 이후 4년 만에 건립된 서울관은 연면적 5만2125㎡에 지하 3층·지상 3층 규모다. 조선왕실의 친인척 사무 담당기관이었던 종친부(서울시 유형문화재 제9호)를 미술관 안에 복원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전시공간을 꾸몄다.
서울관이 표방하고 있는 캐치프레이즈는 ‘현재 속에서 과거와 미래를 접목하는 종합 미술관’ ‘글로벌 다양성을 증진하는 한국 예술의 중심 미술관’ ‘문화 발전을 생성하는 열린 미술관’이다. 시민들이 편하게 찾을 수 있는 열린 미술관을 지향하면서도 세계 곳곳의 관람객들에게 한국 현대미술을 선보이는 국제적인 미술관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인 미술관의 조건은 무엇인가. 전시공간도 중요하지만 우선 좋은 작품이 많아야 한다. 지난 22일 서울관 개관 D-20 간담회에서 윤남순 기획운영단장은 “현대미술품 중에는 1000억원이 넘는 작품도 있다. 세계적인 작품이 있으면 좋겠지만 현재 우리 미술관의 소장품 구입 예산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니 빨리 깨야 한다”고 말했다.
장엽 학예연구 2팀장은 “영국 작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한 점 가져다 놓을 수는 있지만, 그걸 가지고 세계적인 미술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며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내세울 수 있는 건 한국 현대미술 소장품”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최은주 학예연구 1팀장은 “국수주의적으로 한국 작품만 구입하겠다는 것은 아니다”고 설명했다.
해외 미술관과 비교해 국내 미술관의 소장품이 빈약한 것은 각계 인사들의 기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공공기관 등에 미술품을 기증할 경우 세제 감면 등의 혜택을 앞세워 기부를 적극 유도한다. 반면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제약 탓에 기업 등에 기부를 요청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국립현대미술관에는 기증자를 위한 상설전시실 하나 없다.
이를 위한 정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미술품 구입 예산을 늘리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다. “반듯한 전시장을 지어줬는데 돈까지 더 달라는 얘기냐. 운영은 책임을 지고 알아서 해라”는 식이어서는 곤란하다. 경복궁 옆 미술관인 서울관에 볼거리가 넘쳐 지구촌 관람객들이 기꺼이 찾아오는 국제적인 명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