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죽음의 행렬을 멈춰라
입력 2013-11-01 16:55
누가복음 7장 11∼16절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무대는 나인성입니다. 나인이란 ‘매우 아름다운 혹은 매력적인’이라는 뜻입니다. 아름다운 도시에 한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름다운 도시, 매력적인 성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아름다운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데, 서로 돕고 사는 이야기, 억울한 일들이 사라지고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건들이 일어나야 하는데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적 약자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여기 오늘 본문이 주는 묘한 대조와 역설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의 억울한 죽음의 행렬. 이렇게 보면 2000년 전 예수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 속에서 사람들은 장례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장례도 종교의 역할이지요.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사람들에게 소리칩니다. “그 장례행렬을 멈춰라.” 행사중지 명령이 아닙니다. 장례 행사를 방해하는 행동이 아닙니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그 아이의 몸을 만집니다. 14절에 관에 손을 대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만 그 관은 우리와 달리 고인의 몸을 올려놓은 판 같은 것입니다. 관에 손을 대었다는 것은 죽은 자를 만진다는 뜻의 우회적 표현입니다. 부정한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율법. 그 율법을 거스르면서 사람을 살리는 예수. 여기에 생명의 나라가 열리고 있습니다. “안돼, 만지면 안돼.” 죽음의 질서를 굳게 지키고 있는 율법의 질서를 파기함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고 새로운 세상, 생명의 나라를 이루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생명의 일꾼입니다.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하는 이 세상의 원리대로 살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억울한 죽음의 나라를 방치한다면 누가 이 죽음의 질서를 생명의 질서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율법이라는 관행, 그 기득권의 질서를 돌파하고 극복함으로써 생명의 나라는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금 그렇게 새롭게 부르고 계십니다. 모두가 경쟁과 탐욕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세상에서 다른 세상의 질서를 꿈꾸라고 하는 것이지요. 한번 새롭게 살아보라고 세상이 가르치는 고정관념에 매이지 말고 새로운 대안적 삶을 꿈꾸어 보라고, 새롭게 해보라고 우리를 격려하고 있지 않습니까.
죽음의 관행을 혁파하라.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율법이라는 기득권에 도전하라.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죽은 자의 몸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은 죽음의 질서에 종살이하는 우리에게 생명의 기운을 불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살아난 것은 죽은 청년만이 아닙니다. 어미 과부가 다시 살아났고 나인성이라는 도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께서 정말 살리고자 한 것은 이 사건을 접하는 우리 모두의 생명입니다. 죽음의 질서에 종살이하는 우리 모두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있는 것이지요.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해 세상과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판단하고 다르게 살라고 하는 그 생명의 길로 한 발짝 나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진우 서울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