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남현] 노래를 날개 삼아 다시 날다

입력 2013-11-01 17:20


그의 날개는 펴지지도 않은 채 꺾였다. 성악도는 사고로 ‘소리’를 잃었다. 척추 손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더 이상 바리톤의 소리를 낼 수 없는 몸이었다. 병실에 누웠다. 사각형 천장을 바라보며 절망했다. 이 사각형에 영영 갇혀 지내야 하는구나. 새장 속 새 같았다. 하나님을 원망했다. 왜 노래조차 부를 수 없는 몸으로 저를 만드셨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꿈을 불어 넣어 주셨다. 노래를 부르렴, 크게. 아이들이 웃게. 그는 노래를 다시 시작했다. 1년 동안 7음계만 외웠다.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장애인에게는 용기를, 비장애인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노래 불렀다. 어느 날 꿈꾸던 무대에 섰다. 노래 제목은 ‘더 이상 날지 못하리’. 사람들은 성악가 이남현(32)씨가 휠체어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을 봤다.

‘플라시도 도밍곰’- 키 182㎝, 몸무게 100㎏

서울 한강로 용산역과 연결된 야외 광장에서 그를 만났다. 만나기로 한 시간 그는 햇볕이 내리는 벽을 등지고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쌍꺼풀 진 큰 눈이 맑아보였다. “안녕하세요?” 낮고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이씨는 여러 가지 질문에 자주 낯을 붉히며 약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런 것도 아셔야 되나요?” 수줍음 많은 청년 같아 보였다.

하지만 사고 전 밝고 쾌활했다고 했다. 별명은 플라시도 도밍곰이었다. 플라시도 도밍고에 ‘곰’을 더했다. 키 182㎝, 몸무게 100㎏. 덩치 큰 그에게는 곰이라는 별칭이 따라 다녔다. 스페인 출신의 성악가 도밍고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꼽힌다. 그가 목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자 별명은 2개를 결합한 ‘플라시도 도밍곰’이 됐다. 그는 이메일 주소로 도밍곰(dominggom)을 사용했다.

이씨는 4㎏ 우량아로 태어났다. 늘 교실 뒷자리를 차지하는 키 큰 아이였다. 호기심 많고 씩씩했다. 초·중·고교부터 대학까지 주변에는 친구들이 항상 많았다. 잘 웃고 목소리 큰 그를 친구들은 좋아했다. 독실한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란 그는 교회에서 찬송 부르길 즐겼다. 중3 무렵 부친의 회사를 따라 목포로 전학했다. 전남 무안에 있는 전남예고에 진학했다.

처음 그는 ‘예고’ 졸업한 이야기 하는 것을 꺼렸다. “제가 고교 이야기한 적이 별로 없는데….” 난처한 표정이었다. 왜 그러는지 물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참 혜택을 받고 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렵게 지내는 장애인 분들도 정말 많잖아요. 제가 장애인이 된 뒤 예고 졸업하고 음대를 간 게 어떤 분들한테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돼서요.” 그의 표정은 누군가에 미안한 표정이었다.

“산과 물이 아름다운 곳에서 신나게 지냈어요.” 고교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성악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 이용천(60·목포 양동제일교회) 집사와 어머니 김춘시(58) 집사는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했다. 반대하진 않았다. 목포대 성악과에 입학, 1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저는 참 평범하게 살았어요. 학교 다니고 여자친구 사귀고 교회 출석하고….”

1800초 버틴 ‘곰’- 네모에 갇히다

2004년 봄 제대했다. 여름 8월 12일. 친구들과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야, 헤엄 좀 살살 쳐라. 덩치도 큰 녀석이 팔다리를 마구 휘저으니까 물보라가 장난이 아니잖아.” 친구들이 이씨를 놀렸다. “무슨 곰 한 마리가 수영하는 줄 알았네.” 왁자지껄 웃으며 수영을 즐겼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잠수를 하려고 다이빙했다. 친구들을 놀래주려고.

‘번쩍.’ 번개가 치는 듯 눈앞에 빛이 비쳤다. ‘수영장에 웬 불빛이지?’ 그는 물 속으로 머리를 넣은 게 아니었다. 수영장 벽면에 부딪혔던 것이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30분 동안 물 속에 잠겨 있었다. 친구들은 그가 잠수를 하는 줄 알았다.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로 갔다. 폐에 찬 물을 빼냈다. 이어 6시간에 걸쳐 수술을 했다.

친구들이 물에서 끌어냈을 때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말했다. 의학적으로는 뇌에 5분 이상 산소가 공급되지 않으면 뇌사 상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말을 했다. 의사는 “30분 동안 물 속에 있었는데 어떻게 의식이 있나요?”라며 놀랐다. 이씨는 “개인적으로는 그 30분을 기적의 1800초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부러진 목뼈 조각 수십개를 제거하고 골반뼈를 목에 이식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후 그는 네모 세상에 갇혔다. 중환자실에 누워있었다. 눈으로 천장을 보는 것 외에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눈은 직사각형 천장에 고정됐다. 아버지는 의사에게 물었다. “회복이 불가능한가요?” 주치의는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하다고 봐야 합니다”라고 했다.

‘하나님 왜 하필 저입니까?’ 그는 원망했다. 침대에 누워 보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TV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서울 방이동에서 김모씨가 뛰어내려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지고 말았습니다.” 자살 소식이었다. 그 순간 이씨는 그가 가장 부럽게 느껴졌다. “하나님 저를 이렇게 두시려면 왜 살리셨습니까?”

‘곰’의 손 잡은 아이 “형아, 들어와요”

아들의 부모는 계속 기도했다. 병원에서 그를 간병하던 어머니는 병원 내 교회에서 새벽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병실에서 성경 읽던 어머니의 모습을 본 그는 소리 질렀다. “성경은 읽어서 뭐 해요? 기도가 무슨 소용이에요?” 그는 눈을 감아버렸다. 어머니는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다. “아버지 저 이제 하나님 안 믿어요. 절대 교회 안 갑니다.”

아버지는 “남현아.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할 사람이야. 사고는 하나님이 너 그동안 힘들게 살았다고 쉬는 시간 주시는 거야. 다시 회복되면 하나님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느 날부터 부모는 주일마다 그를 병원 교회로 데려갔다. “싫다고요. 싫대도요.” 휠체어에 실려 거의 강제로 교회에 나갔다.

어느 주일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찬송을 따라 부르고 있었다. ‘주를 향한 나의 사랑을 주께 고백하게 하소서.’ 아버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그를 쓰실 거라는. 어린이 병실 앞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한 아이가 창문 밖을 내다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귀여운 아이였다. 아이가 문을 열고 나왔다. “형아, 들어와요.”

병실 안에는 경쾌한 어린이 동요가 나오고 있었다. “개울가에∼ 올챙이 한 마리∼ 꼬물꼬물 헤엄치다 ∼” 아이들은 음악에 맞춰 율동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굉장히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으로 온몸이 전율되는 느낌이었다. ‘다시 노래를 하자. 아이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노래를 부르자.’ 하지만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현씨는 폐활량이 일반인의 20∼30% 수준입니다. 척추신경 손상으로 복식호흡을 할 수 없어요. 성악은 불가능해요.” 그러나 그는 2007년 복학했다. 처음 그를 맞은 김철웅 교수가 그에게 왜 노래 하고 싶냐고 물었다. “제가 노래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 교수는 “남현이가 꿈을 꼭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며 그의 어깨를 도닥였다.

‘도밍곰’ 꿈의 무대에서 날아오르다

1년 넘게 ‘도레미파솔라시도’ 연습만 했다. 노래는 1곡만 불렀다. 우리 가곡 ‘청산에 살리라’. 끝까지 이어서 부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숨이 차 늘 쉬어가며 불러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교수가 그를 보고 물었다. “오늘 몸 괜찮지. 잘해보자.” 이날 이씨는 한번에 이 노래를 불렀다. 김 교수는 “브라보”를 외쳤다. ‘내가 정말 노래를 다 부른 건가.’ 그의 큰 눈동자보다 더 큰 눈물이 맺혔다.

스승은 그를 외부 무대에 내보냈다. ‘주님 도와주세요.’ 그의 무대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제가 휠체어를 타고 무대 뒤에 대기하잖아요. 한번은 공연 스태프가 제게 ‘죄송하지만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라고 한 적도 있어요. 휠체어 탄 사람이 성악가라는 상상을 잘 못하니까요. 저는 당당하게 척추손상으로 무신경이 됐지만 노래를 한다고 말해요.”

여러 무대의 초청이 들어왔다. “제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하나님이 큰 은혜로 앞 길을 열어주신다는 체험이었어요.” 꿈의 무대도 곧 열렸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꿈. 2011년 9월 그는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금난새가 지휘하는 유라시안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그날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아리아 ‘더 이상 날지 못하리(Non piu andrai)’를 불렀어요.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이씨는 올해 8월 책 ‘나는 지금이 좋다(터치북스)’를 냈다. “기자님이 들고 오신 제 책을 보니 왠지 굉장히 쑥스럽네요. 얼마 전 제가 다니는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님이 제 책을 설교 중 말씀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도 참 쑥스럽더라고요.”

그는 희망 전도사로 살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서 만난 환자 분, 서울역에서 만난 노숙인이 제 노래에 위로 받았다고 할 때 기뻤어요. 보이는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는 포기하지 않으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분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고 싶어요.” 그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을 물었다.

“사람들이 편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은 고난과 기쁨을 골고루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거 같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기쁨만 받길 원하고 고난은 거부하지요. 고난을 통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도 있고 더 큰 기쁨을 누릴 수도 있는데 그걸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저도 이걸 깨닫는데 엄청나게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어요(미소).”

추가로 궁금한 것 한 가지. 여자친구가 있을까. 현재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30가지나 되는 여자친구 기준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 기준은 몇 가지인가요?” “이제 세 가지뿐이에요. 시간이 지날수록 줄더라고요(웃음).” 진지하게 덧붙였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고 음악에 관심 있는 자매님이라면 다 좋아요. 그런 분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그에게 일정을 물었다. “연말까지 ‘중요한’ 일정이 있으세요? 중요한 공연이나 큰 행사나.” 그가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떤 게 중요한지 잘 모르겠는데요. 저한테는 한 사람이나 여러 사람이나 중요하긴 다 마찬가지예요.” 무심코 질문했던 기자는 당황했다. “독자들 중 남현씨를 만나고 싶은 분에게 일정을 알려주려고요.” 질문 취지를 설명해야 했다. 그에겐 작은 것이 더 소중해 보였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