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길] 20세기 최고 지성 수전 손택의 아픈 성장통

입력 2013-10-31 18:53


다시 태어나다/수전 손택/도서출판 이후

타인의 일기는 개인의 내밀한 치욕이나 통증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독자들을 쾌감과 죄의식 사이에 놓이게 한다. 하물며 ‘진실’과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살았던 미국 최고의 평론가이자 소설가 수전 손택의 일기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체험과 사유를 공공재로 내놓을 수밖에 없는 작가의 운명을 감안한다 해도 무척 고통스런 일이다.

손택은 2004년 12월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하기 전, 외아들 데이비드 리프에게 넌지시 일기의 존재를 알린다. 그가 남긴 100여 권의 일기는 너무도 솔직하다 못해 고통스러운 기록이었지만 리프는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날것 그대로의 일기를 ‘다시 태어나다’(원제 Reborn)라는 제목으로 펴낸다. 손택의 인생 가운데 1947∼63년까지 청춘의 한 토막엔 무엇이 적혀있을까. 그는 사춘기 시절 성적 자각과 독서 편력에 관한 대담하고도 거침없는 비평들, 그리고 수치심과 절망감으로 점철된 연애사를 가감 없이 진술하고 있다.

“나는 질문한다. 무엇이 나를 무질서로 몰고 가는가? 스스로를 어떻게 진단할 수 있는가? 내가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교감에 대한 통렬한 욕구뿐이다. 나는 아직 어리니까. 어쩌면 나의 이 불온한 성적 욕구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자신의 불온성을 폭로한 이 일기는 놀랍게도 그가 15세이던 1948년 12월25일에 씌어졌다. 이듬해 4월 6일엔 이렇게 이어진다. “남성과의 육체관계는 생각만 해도 굴욕적이고 나를 비하시키는 기분이다. 처음으로 그와 키스했을 때-굉장히 긴 키스였다. 분명하게 이런 생각을 했다. ‘이게 다야?-너무 바보 같잖아.’”

16세에 UC버클리에 입학한 손택은 훗날 미국 지성계의 대모이자 전방위 문화평론가로 성장하지만 그 성장의 이면엔 회피할 수 없는 성장통이 가로놓여 있다. 그 성장통이야말로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서 신중한 사유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 계기였던 것이다. 버클리에 들어간 1949년 겨울, 대담하게도 자신이 존경하는 토마스 만을 찾아가 그와 문학을 논하는가 하면 독서 목록을 만들어 체계적으로 문학의 영혼과 만났던 이 지성적 삶을 일기로 읽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이런 고백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일기는 앞으로 2, 3권으로 이어져 번역될 예정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