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기업하기 싫은 나라
입력 2013-10-31 18:43
“삼성전자 실적에 가린 기업들 위기 제대로 보고 기업하기 좋은 환경 만들어야”
30년간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사업을 해온 50대 중반의 정모 사장. 여러 곳에 매장을 갖고 있고 연 매출 340억원을 넘을 정도로 성공했지만 요즘 사업을 접고 싶은 마음뿐이다. 자라 등 외국계 중저가 브랜드들이 밀려들어오면서 타격이 큰데 인건비 부담 때문에 가격을 낮출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정 사장은 요즘 사업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부류라고 한다. 한 부류는 빚이 아주 많아서 사업을 정리할 수 없는 사람들, 또 한 부류는 스마트폰이나 IT 등 그나마 수익이 나는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는 “중소기업 사장들이 요즘 뭐 하고 있는지 아느냐. 돈 안 되는 사업 정리하고 골프나 치러 다닐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2000년 국내 최초로 청소년 영자신문 사업을 시작한 이모 사장. 불모지나 다름없던 어린이·청소년 대상 영자신문 시장을 개척해 연 150억원 매출을 올리며 1위 기업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2년 전 유력 언론사가 이 회사가 발행하는 영자신문의 판형과 편집 내용, 디자인, 학습지원 웹사이트까지 베껴 청소년 영자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지난해 10월부터는 제호와 서체까지 모방했다. 13년간 이 분야에서 명성을 쌓았는데 ‘짝퉁 브랜드’가 등장하자 독자들이 혼선을 일으키면서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 이 사장은 해당 신문사에 항의를 하고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도 하며 ‘계란으로 바위치기’ 싸움을 한 끝에 해당 신문사의 항복을 얻어냈다.
요즘 기업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대기업이든 중견·중소기업이든 가릴 것 없이 죽겠다고 아우성이다. 심지어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들다고 얘기하는 기업인도 많다.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이 전 세계 189개국 중 7위로 최상위권이라는 세계은행 발표나 올 3분기 경제성장률이 작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3.3%를 기록하면서 7분기 만에 최고라는 정부 발표들은 딴 세상 얘기일 뿐이다. 대다수 기업들은 영업이익이 반토막나서 죽을 맛인데 삼성전자의 눈부신 실적 때문에 한국경제가 좋은 것처럼 착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웅진그룹과 STX, 동양그룹의 잇따른 부도나 법정관리는 1997년 외환위기 악몽을 떠올리게 한다. 앞으로 또 몇 개 기업이 나자빠질지 모른다. 그런데도 정부는 위기의식이 없다. 부실기업을 솎아내는 일은 게을리하면서 기업들에 투자하면 업어주겠다며 립서비스만 했지 정작 뭉텅이 규제는 풀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뒤로는 135조원의 복지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국세청과 관세청을 동원해 중소기업 사무실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니고 있으니 누가 기업할 마음이 나겠는가.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경쟁을 해도 부족할 판인데 규제를 풀고 부동산 시장을 정상화시킬 법안들을 꽉 움켜쥔 채 정쟁에만 몰두하는 정치권은 더 한심하다.
한국은 안 그래도 기업하기 참 힘든 나라다. 경기변수 외에 정권 눈치도 봐야 하고 대기업들의 횡포도 막아내려면 국회의원이나 정부 관료 등 두루두루 힘깨나 쓰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아놔야 한다. 노무현정부 시절 급성장하며 휴대전화 업계 2위까지 넘봤던 박병엽 팬택 전 부회장은 몇 년 전 사석에서 “정권이 바뀌니 10여곳에서 조사를 나와 훑고 갔다”며 “전라도 출신 기업인이다보니 뭔가 전 정부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하더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이디어나 기술력 하나만으로 기업이 성장해가기가 쉽지 않은 게 우리 현실이다.
얼마 전 세계 1위 휴대전화 업체이자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는 대표 기업이었던 노키아가 몰락한 뒤 핀란드에서 오히려 기업가 정신과 창업이 만개하고 있다는 기사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실렸다. 노키아에서 빠져나온 IT 인재들이 벤처기업 수천개를 세우고 ‘제2의 앵그리버드(모바일 게임)’를 만들기 위해 밤낮 없이 뛰고 있다는데 삼성그룹이 빠진 대한민국은 어떨까.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우리가 대비해야 할 미래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