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축되는 국민연금, 걱정되는 노후] (下) 쥐꼬리 연금도 못 받는 사람들
입력 2013-10-31 18:05 수정 2013-11-01 00:36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한데…” 1300만명 연금 사각지대
“국민연금에 가입한 적이 있나요?” “허어, 국민연금요?”
경남지역의 대리운전 8년차 변일섭(54)씨는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국민연금이고 뭐고 아무 것도 없어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아플 때 돈 나오는 한 달 7만원짜리 보험(실손의료보험)은 하나 들었어요. 연금은 필요 없어도 벌어먹고 살려면 병원 갈 돈은 있어야죠.”
1979년부터 내내 골프장에서 일했다는 베테랑 경기보조원(캐디) 이경숙(53)씨 반응도 엇비슷했다. 평생 국민연금 보험료라는 걸 내본 적은 없고 국민연금에 가입했다는 동료 캐디 얘기도 30여년 일하면서 딱 한 번 들었다고 했다. 캐디는 국민연금에 가입할 때는 고용주가 보험료 절반을 내주는 ‘직장가입자’가 아니라 본인이 100% 책임지는 ‘지역가입자’로 분류된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이씨는 “보험료도 다 내 월급에서 내라고 하던데 빠듯한 살림에 이제 와서 그럴(국민연금에 가입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남편과 사별한 후 서울의 한 김밥집에서 하루 10시간씩 일하고 있는 김상순(가명·42)씨. 연금도 없이 혼자 지낼 노후가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100만원 남짓한 월급에 월 9만원 넘는 보험료가 부담스러워 국민연금 가입을 포기했다. “원래 사장님이 보험료 절반은 내줘야 하는 거라고 하대요. 그래도 안 준다면 우리가 어쩌겠어요? 주변에 연금 해준다는 식당은 한 군데도 못 들어봤는데.”
◇쥐꼬리 국민연금, 그마저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우리나라에서 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18∼59세 인구 3285만명 중 실제 보험료를 내고 있는 이는 절반에 못 미치는 1544만명(2013년 기준)이다. 물론 보험료 안 내는 이들 중에는 별도의 연금이 있는 공무원·교사도 있고 학생이나 군인도 있다. 이런 사람들 400만명 이상(2011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100세 행복연금 프로젝트’ 보고서를 토대로 계산)을 뺀다고 해도 ‘지금’ 보험료를 내지 않아 ‘미래에’ 노후가 불안해질 1300만명이 존재한다. 국민 연금의 사각지대다. 40∼50% 정도가 국민연금이라는 제도에 난 구멍이라는 뜻이다.
국민연금 제도의 취지대로라면 사각지대 1300만명은 모두 돈을 벌지 않는 무소득자(월 60시간 이하 근로자 포함)여야 한다. 실상은 다르다. 사각지대를 차지하고 있는 상당수는 놀고먹는 무직자들이 아니라 돈을 벌면서도 보험료를 못 내고 있는 저소득 근로층이다. 식당 주방보조원, 건설현장 일용직 노동자, 영세 제조업체 근로자 같은 사람들이다. 매달 월급 받고 고용관계도 분명하지만 직장가입자로는 인정받지 못한다.
김밥집 김씨 경우가 그렇듯 이유는 세원 노출을 꺼리는 고용주가 사업장등록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길은 있다. 보험료를 전액 부담하는 지역가입자로 신고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 선택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살림살이가 빠듯해 지역가입자 지위를 포기한다고 해서 그걸 ‘자발적 선택’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지난해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가 발표한 ‘연금개혁에 관한 연구’를 봐도 저소득 근로자들이 겪는 고충은 확인된다. 지역가입자들 중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미납률은 임금근로자가 72%로 자영업주(42%)의 배에 가까웠다. 분류상 분명히 월급쟁이인데 지역가입자에 편입된 이들의 상당수가 돈이 없어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사각지대를 지적하면 정부가 늘 하는 대답이 있다. “소득 파악이 어렵다”는 것이다. 노점상, 슈퍼, 문방구, 치킨집 같은 동네 자영업자들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하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사각지대는 의도적으로 소득을 감추는 회피자나 세원 노출을 꺼리는 자영업주보다는 고용이 불안한 저소득 임금노동자들인 셈이다.
이용하 국민연금연구원 연금제도연구실장은 “국세청에 신고된 피고용인구가 1600만명인데 국민연금 사업장가입자는 1100만명이다. 나머지 500만명은 근로자이면서 사업주들이 신고를 회피해 지역가입자로 돈을 내거나 그나마도 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법이 방치한 사각지대=아예 제도가 사각지대를 만든 직종도 있다. 골프장 캐디, 대리운전기사, 학습지 교사, 보험설계사, 퀵서비스 기사 같은 특수고용노동자들이다. 이들은 평균 소득 월 122만9000원의 대표적인 저소득 근로층이지만 봉급 대신 실적에 따라 수당을 받는다 해서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역시 연금 혜택을 받으려면 지역가입자로 소득신고를 해야 한다. 실적은 저조하다. 저임금에 100% 보험료 부담까지 겹쳐 캐디의 국민연금 가입률은 12.6%, 퀵서비스 기사는 30.5%, 보험설계사는 54.6%에 불과하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국내에 만연한 변칙적 고용형태를 지적하기도 한다. 국내 제조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다시 영세업체로 하청에 재하청을 거치며 사업장 규모가 점점 작아진다. 마지막 단계에 가면 더 이상 사업주인지 직원인지 구분이 모호해진다. 근로자이면서 동시에 영세자영업자이기도 한 일군의 저소득 일자리들은 이 지점에서 양산된다.
주 교수는 “국민연금의 사각지대가 넓은 이유의 밑바닥에는 이런 왜곡된 노동시장 구조가 있다”며 “당장 노동시장 문제 전부를 해결할 수 없더라도 고용주가 사용자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도록 행정적 제재와 감시를 엄격하게 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기대 미달 보험료 지원 사업=문제 해결의 당근책으로 정부는 지난해부터 두루누리 사회보험 지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사업주와 근로자가 내야 하는 국민연금과 고용보험 보험료 절반씩을 국가가 대납해주는 제도다. 10인 미만 영세사업장의 월 130만원 미만 저임금 근로자가 대상이다. 호응이 나쁘지 않긴 한데 문제의 크기에 비해 지원 규모가 작다는 비판이 많다.
지난 4월 기준 보험료를 지원 받는 대상자는 87만여명이다. 그나마 신규 지원자가 38만건(44%)으로 절반에 못 미친다는 점도 늘 지적된다. 이미 보험의 우산 아래 있는 사람이 절반 이상 지원을 받고 이 제도 덕에 새로 국민연금에 편입한 이는 상대적으로 적다는 뜻이다.
이용하 실장은 “1년 동안은 80%쯤 지원해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초기 인센티브를 늘려야 신규 가입자를 늘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제갈현숙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도 “두루누리 같은 보험료 지원 사업이 모든 걸 해결할 수 없겠지만 대폭 늘릴 필요는 있다고 판단한다”며 “이 외에 사업주에 대한 감시, 각종 연금 보너스(크레디트) 제도 확충 등 다방면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사각지대 문제는 계속 짐으로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