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환율 갈등] 美,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적극적 구두개입에 불만
입력 2013-10-31 18:23 수정 2013-10-31 22:07
미국 정부가 환율정책 반기보고서에서 원화 저평가를 거론하며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지적한 것은 환율 개입의 투명성을 강조했던 기존 입장보다 한 발 더 나간 것으로 풀이된다. 20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한국 정부가 원·달러 환율과 관련해 적극적인 구두 개입에 나선 데 대한 불편한 심기가 엿보인다. 특히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과 맞물려 미국의 대아시아 무역적자가 악화될 가능성도 우려한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 환율 1050선 개입 문제삼은 듯=지난달 초 달러당 1090원 선을 오르내렸던 원·달러 환율은 이달 들어 급속히 하락했다. 불과 한 달여 만에 1050원 선을 위협하면서 외환당국은 구두개입을 포함해 적극적인 시장안정조치를 단행했다. 10월 23일 원·달러 환율이 1054.50원으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하자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1060원대로 끌어올렸다. 2008년 7월 이후 5년여 만의 일이다. 이후 원·달러 환율은 당국 개입에 대한 경계감과 수출업체의 네고 물량(달러화 매도)이 팽팽하게 맞서며 1060원대 초반에서 움직이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는 최근 들어 한국 정부가 미세조정과 구두개입을 동시에 시행하면서 환율을 지나치게 방어한다는 인상을 줬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은 국제통화기금(IMF)의 보고서를 인용해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적정수준 이상으로 많다고까지 지적했다. 최근 한국 정부가 호주와 통화스와프를 체결할 움직임을 보인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시각도 있다. 호주달러는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보유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무역 결제 시 달러화를 대체할 수 있다. 미국은 자국 달러화가 점차 위안화의 위세에 눌리는 상황에서 한국이 다른 나라들과 통화스와프를 속속 체결하는 데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정부는 미 재무부 보고서가 환율정책에 영향을 주기는 힘들다는 입장이다. 기재부 관계자는 31일 “미 정부가 국제통화기금 보고서를 인용해 우리 외환보유고가 많다고 지적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대외 리스크 요인을 감안해 현재 수준의 외환보유고가 필요하다는 나름의 판단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양적완화 축소 앞두고 무역적자 우려=미 재무부는 보고서에서 한국과 함께 일본의 ‘아베노믹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보고서는 “올해 일본 중앙은행이 경제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노력을 시작했지만 엔화 약세로 이어졌다”며 “이 때문에 미국과의 무역 격차가 더 크게 벌어질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런 우려의 배경에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양적완화 축소 움직임이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수년간 지속된 양적완화로 달러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은 꾸준히 이득을 봤기 때문이다. 박성욱 금융연구원 거시국제금융연구실장은 “양적완화가 축소되면 달러 강세로 갈 가능성이 높은데 한국은 경상수지 흑자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미국 내에서 무역적자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경상수지 흑자국은 환율을 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를 미국 정부가 무시하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아베노믹스가 영향을 미친 것이 환율 부문이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 정부의 기본 정책방향에 대해 동의했다 하더라도 무한정 엔화가 절하되는 것을 환영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정부, 운신의 폭 좁아질 듯=2009년 미 정부가 한국의 외환시장 개입문제를 거론했을 때는 금융위기 직후였다. 우리나라에는 외환보유고를 늘려야 하는 명분이 있었고 경상수지도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나라 외환당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겠다며 눈을 부릅뜬 상황에서 과거보다 정부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제한될 전망이다. 이창선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미 재무부가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향후 시장 개입보다 거시건전성을 높이는 다른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향후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환율 문제를 본격 거론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재부 관계자는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 같은 국제회의에서 미국이 환율 문제를 들고 나올 수 있다”면서 “그러나 지금 당장 대응한다기보다 그때 가서 대응해도 늦지 않다”고 말했다.
세종=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