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 40년, 풍경마다 은총의 신비… 허형만 시집 ‘불타는 얼음’
입력 2013-10-31 17:43
목포대 교수를 지낸 허형만(67·사진) 시인이 올해로 시력 40년을 맞아 신작 시집 ‘불타는 얼음’(도서출판 고요아침)을 상재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의 눈망울에 맺히는 풍경은 거개가 은총의 신비다.
“지리산 중턱을 에둘러 싼/ 저 안개 속으로/ 새 한 마리 빨려들어간다/ 빈 하늘에/ 흐르르 흐르르/ 바람칼 날던 소리만/ 물빛처럼 반짝인다/ 내 생애의/ 한 줄기 자드락길도/ 저 허리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참 이윽하다”(‘허리안개’ 전문)
‘허리안개’는 산중턱을 에둘러 싼 안개를 말한다. ‘이윽하다’는 ‘느낌이 은근하다’는 의미다. 산다는 것은 풍경을 지우는 허리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지워진다는 것을 수긍하는 나이듦을 어찌 청춘과 맞바꿀 수 있으리. 다시 청춘을 돌려준다고 해도 이 경지가 너무 이윽하여 맞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경지란 무엇인가.
“참 먼 길 왔다/ 나보다 먼저/ 이 나무에 못 박혀 죽어간/ 예수란 분도 있지만/ 나는 이 나무 그늘에 쉬며/ 석양 노을을 본다/지상의 피곤함은 노을보다 가볍다/ 한 줄기 바람이/ 나의 영혼을 쓰다듬는다”(‘꽃산딸나무 아래 쉬며’ 전문)
‘이 나무 그늘’이란 어떤 그늘인가. ‘나’의 죄로 인해 십자가를 진 예수가 만든 그늘이다. 이 그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가 죽어갔는가. ‘나’는 이제 내가 살아가는 지상의 삶이 사소해지는 나이가 됐다. 그러니 ‘나’의 영혼을 위로하는 것은 물질도 명예도 아닌 ‘한 줄기 바람’일 뿐이다. 이렇듯 사소한 일상에 깃든 은총과 감사와 축복이야말로 신비의 삼위일체라 할 것이다. 허형만은 이 신비의 삼위일체에서 ‘생명의 힘’을 보고 있다.
“봄날 아침, 미치게 푸른 하늘로/ 바람칼 쫙 펴 날아다니는 새 한 마리를 보았다/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에/ 그 새는 이미 새가 아니라 십자가였다/ 날아다니는 십자가를 본 순간/ 나의 가슴은 뛰었고/ 두 손을 포개어 가슴에 얹어 숨을 골랐다/ 비로소 정신이 맑아지고/ 나의 언어의 숲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생명의 힘은 이처럼 창조를 낳는다”(‘생명’ 부분)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