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淸으로 끌려간 남녀, 그들을 괴롭힌 진짜 敵은… 유하령 첫 장편소설 '화냥년'

입력 2013-10-31 17:42


377년 전 병자호란 당시 이 땅에 살았던 남녀가 있다. 강(康)과 선(鮮). 각각 스무 살, 열일곱 살이었던 이들은 청나라에 전쟁 포로로 끌려가 돌아오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입시에 억눌리거나 대학생이 되거나 직업을 구해 자기 정체성을 찾는 데 골몰할 나이지만 이들은 혹독한 겨울 추위속에서 석 달을 걸어 심양으로 끌려갔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 열에 여덟은 죽었다. 청군에게 맞아 죽고, 강간당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고 압록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포로로 잡힌 이들이 50만명이나 되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10% 남짓이었다.

유하령(51)의 첫 장편 ‘화냥년’(푸른역사)은 그들의 이야기다. 소설에서 ‘화냥년’은 청나라에 끌려가 살아남은 조선인 포로 남녀 모두를 가리킨다. 당시는 포로가 되어 살아남았다는 것, 청의 앞잡이가 되어 명군과의 전쟁터로 나갔다는 것, 청에서 살아남아 돌아왔다는 것이 모두 절개를 잃은 ‘화냥질’이 되어버리는 때였다. ‘화냥년’이 된 조선인 포로에게 돌아갈 ‘조국’은 없었다. 강화도에서 청군에게 붙잡힌 강과 선의 삶이 그랬다.

“포로 속환 시장이 열리기 열흘 전 일이었다. 키르사의 몸종인 호녀가 천막에 들어와서 선에게 키르사가 부른다고 나와 보라고 했다. 주란타이의 딸인 키르사는 열일곱 살인 선과 같은 또래였다. 선은 심양에 도착하고서도 며칠이 지나서야 바지저고리에서 치마저고리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같이 끌려온 포로들은 그제야 선이 여자인 줄 알고 놀라더니 선의 꽃잎처럼 청초한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23쪽)

선은 간신 조경호의 딸이다. 오라비 조윤노는 청군에게서 도망치며 친구인 강에게 누이 선을 부탁한다. 심양에서 선은 주란타이 장군의 딸 키르사의 꼬임에 빠진 몽골왕공 수흐에게 겁탈당할 위험에 처하고 강은 그런 선을 구하다가 죽을 만큼 얻어맞기도 한다. 한편 속환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선은 오라비 조윤노에 의해 강화도로 쫓겨가 있었는데 징기스칸의 옥새를 잃어버린 수흐가 심양에서부터 쫓아와 선을 납치한다. 소설은 강이 눈보라치는 몽골초원의 게르 안에서 수흐를 죽이고 선과 선의 아이, 그리고 키르사가 낳은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조선인 포로들의 마을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맺는다. 하지만 정작 작가가 쓰고 싶었던 것은 포로였던 여자들에게 ‘전쟁’은 삶이 계속되는 한 끝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더구나 진짜 적은 청군이 아니라 조선 내부에 있었다. 조윤노가 강의 손에 죽기 전에 “선이 심양에서 화냥질을 하고 사는 것을 네놈은 왜 모르냐”고 공격하는 대목이 그것.

여성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다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인 포로에 빠져들어 10년의 각고 끝에 이 소설을 내놓은 유하령은 “그동안 병자호란과 관련된 소설적 관심은 인조와 소현세자에 국한돼 있었다”면서 “수많은 사료들에서 사건과 사실을 추출해 무대로 삼고 조선인 포로의 삶을 상상했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조선인 포로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말할 것도 없이 청군이었지요. 하지만 도망친 포로를 도로 붙잡아 청으로 보냈던 조선의 관리, 포로 사냥꾼, 포로 장사꾼, 충신과 열녀가 되라고 이들을 억압했던 유교 이데올로기 역시 또한 적이었지요. 속환되어 조선으로 돌아온 여자들에게는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허물이자 하자가 되었지요.”

작가는 “최근 역사평설 ‘병자호란’을 펴낸 남편 한명기 명지대 교수의 저작에 힘입은 바 크다”면서 “역사적 관점과 준거를 특히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를 기준으로 했다”고 밝혔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