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낌 아니까∼” 분위기 타는 단풍의 품격
입력 2013-10-30 17:08
호수·계곡·고개 채색한 ‘원색의 고장’ 제천
단풍도 사연 따라 느낌을 안다. 박달 도령을 기다리다 죽은 금봉 낭자의 애달픈 사랑이 깃든 박달재 단풍은 갈색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다. 배론성지의 연못가 단풍은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순교한 천주교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지켰던 신앙을 상징하듯 불꽃처럼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정든 고향을 수장한 실향민들의 애잔한 향수를 기억하는 청풍호 단풍은 아침 물안개 속에서 흐릿한 기억을 반추한다.
청풍호와 자드락길로 유명한 충북 제천은 발길 닿는 곳마다 단풍이 화려하다. 대중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의 무대인 박달재 고갯길도 예외가 아니다. 해발 453m 높이의 박달재는 천등산과 지등산이 연이은 마루로 원래 이름은 이등령. 조선 중엽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 도령과 이등령 아랫마을에 살던 금봉 낭자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박달재로 불리게 되었다.
봉양읍 원박리의 박달재입구 사거리에서 박달재를 넘어 산길이 끝나는 백운면 평동리까지는 약 6㎞. 산짐승과 산도둑이 들끓었다던 아흔아홉 구비 옛길의 흔적은 사라지고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등고선을 그리며 고개를 오른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울창한 고갯길은 박달과 금봉의 로맨스를 찾아 나선 관광버스와 승용차만 보일 뿐 한적하다. 38번 국도를 잇는 터널이 뚫리면서 고개를 넘는 아스팔트 도로조차 옛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제천과 충주를 잇는 유일한 길이었던 박달재는 드높은 산과 푸른 하늘이 맞닿아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가 스피커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고갯마루에는 박달 선비와 금봉 낭자의 애절한 사랑을 형상화한 조각품이 눈길을 끈다. 박달을 기다리는 금봉의 목이 점점 길어지는 조각품들 사이에 뿌리를 내린 단풍이 금봉의 수줍은 얼굴처럼 발그레하다.
박달재와 이웃한 배론성지는 단풍의 품격과 조화를 보여주는 명소이다. 배론성지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숨어 들어온 천주교 신자들이 화전을 일구고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신앙을 키워 나간 교우촌. 배론이란 지명은 마을이 위치한 산골짜기의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을 닮아 주론(舟論)으로 불리다 배론으로 굳어졌다.
은행나무 가로수에서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양탄자처럼 두툼하게 깔린 배론성지에서도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초가집 신학교였던 성 요셉 신학교 앞의 작은 연못. 거울처럼 맑은 수면에는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연못 주변의 단풍나무가 화려한 반영을 드리우고 있다. 연못가에서 가장 돋보이는 나무는 화사한 다홍색으로 물든 단풍나무 한 그루.
배론성지를 품은 단풍산 아래에는 ‘황사영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이 베이징 주교에게 조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帛書)를 작성했던 토굴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정약전(다산 정약용의 형)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이 사건으로 순교하고,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된다.
제천의 단풍은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청풍호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난 봄에 벚꽃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던 호반도로는 이제 빨갛게 물든 벚나무 단풍잎이 낙엽비가 되어 포도를 구른다. 그리고 청풍호에 발을 담근 이 산 저 산에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랐던 산벚꽃 대신 울긋불긋한 색깔의 단풍이 나날이 채도를 높여가고 있다.
청풍호는 1985년에 충주댐이 완공되면서 단양군·제천시·충주시를 흐르는 남한강과 주변 마을이 수몰되면서 만들어진 인공호수. 유람선이 한가롭게 떠다니는 청풍호는 호수를 따라 단양팔경 등 절경이 이어져 ‘중부내륙 답사 1번지’로 불린다. 청풍호와 어우러진 단풍은 청풍리조트레이크호텔과 청풍랜드, 그리고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청풍대교 건너편에 위치한 청풍문화재단지는 제천시의 청풍면을 중심으로 5개면 61개 마을이 수몰 위기에 처하자 보물로 지정된 한벽루 등 청풍에 산재한 문화재 53점을 이전한 곳. 물이 차면서 산에서 언덕으로 바뀐 청풍문화재단지는 조경수로 심어진 단풍나무와 활엽수들이 오후의 가을햇살에 오색등처럼 빛난다. 특히 젊은 여인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있는 형상의 월악산 영봉과 청풍문화재단지의 어울림은 한 폭의 그림.
청풍리조트레이크호텔에서 청풍대교를 건너기 전 왼쪽 산허리를 달리는 호반도로는 산모롱이를 돌 때마다 느낌표와 쉼표를 찍는 자드락길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 자드락길은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좁은 길’을 뜻하는 말로 제천시가 청풍호 주변에 조성한 7개 코스 62㎞로 뱃길 4㎞를 포함하고 있다. 그 중 청풍대교에서 옥순대교에 이르는 12㎞ 길이의 호반도로는 산 중턱에 별장처럼 들어선 E.S.리조트와 단풍이 아름다운 능강계곡, 상천마을의 금수산 용담폭포 등을 연결하는 드라이브 명소이다.
청풍호 단풍의 하이라이트는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옥순대교 중간쯤에 서면 퇴계 이황이 옥순봉(玉筍峰)으로 명명한 해발 268m 높이의 석벽에 뿌리를 내린 단풍나무와 리아스식 해안처럼 들쭉날쭉한 골짜기의 단풍나무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물안개 속에서 퇴색한 앨범사진처럼 모습을 드러낸다. 퇴계를 그리다 남한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관기 두향처럼….
제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