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수진 (2) 1989년 첫 출항… 선교사 30명 빨간 글씨 유언장을
입력 2013-10-30 17:18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집회. 당시 나는 선교가 뭔지도 모른 채 선교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정확하게 4년 뒤 주님은 일대일 면담하듯 선교사로 부르시고 배를 타고 선교하라는 마음을 주셨다. 이후 ‘임마누엘’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었고 여름과 겨울, 무교회 지역과 미자립 교회를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배 선교에 대한 기도제목을 계속 나눴다.
성경 공부를 통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났다. 그중에 ‘한나성경공부팀’으로 불렸던 6명의 권사님들은 말씀으로 삶이 변화됐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뜨거운 기도를 드렸고 나중엔 한나호의 기도 후원자가 되어 오늘까지 동남아의 수백명 선교사들을 후원하는 한나호의 기도 어머니들이 됐다.
“만약 배를 주시면 배 이름을 한나호로 명명하겠습니다.” 당시 한나성경공부팀의 기도였다. 기도로 얻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린 어머니 한나처럼 이분들은 배를 달라고 기도했던 나와 동료들의 기도를 함께 드렸다. 나는 84년을 기점으로 해외 선교에 참가했다. 국제오엠선교회의 둘로스호를 타게 됐고 4년간 선교활동의 경험을 쌓았다.
그러던 88년 선교합창단으로 전환된 한나성경공부팀은 선교사 위문차 스페인 라스팔마스로 가게 됐다. 이때 몇몇 선교사들이 그곳에 모였고 배 사역의 비전을 나누게 됐다. 그런데 라스팔마스한인교회 성도였던 명두식 집사님이 선교선을 한 척 기증하겠다고 나섰다.
전남의 섬마을에서 자랐다는 명 집사는 만약 자신이 사업에 성공하면 섬 주민들을 돕는 배를 헌금하겠다고 옛날부터 서원했다는 것이다. 우리 얘기를 가만히 듣던 명 집사는 그 길로 일본으로 떠났고 얼마 후 30년 된 300t급 어선실습선을 구입했다. 10년 기도제목이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다.
배를 타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선원이 필요했다. 한나호에 형제들이 자원했는데 상당수가 선원선교회를 통해 훈련받은 고급 선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또 한번 실감했다. 또 중보기도의 후원자들도 만났는데 이로써 한나호의 최종 감독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한나호는 이렇게 해서 준비를 끝냈고 89년 6월 한나선교회를 설립했다. 이후 8월 10일 한국 선교사상 최초로 선박을 이용해 30명의 선교사가 부산항을 출발, 힘찬 뱃고동을 울렸다.
첫 출항 당시 배를 찾아오신 목사님들의 말씀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중 고신대 학장이었던 전호진 교수는 이런 말씀을 주셨다. “여러분은 감격스러운 세대에 태어났습니다. 우리 세대의 과업은 교회 설립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세계 선교를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는 후진국형 인력 파송 중심의 선교에서 벗어나 한나호를 통해 인력과 기술, 장비와 팀워크로 선진국형 선교로 전환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 저녁 30명의 선교사들은 첫 출항의 긴장과 긴 항해를 앞두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우리를 부르시고 훈련시키신 주님. 이번 첫 항해에서 사역을 못하고 죽을지라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감사함으로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우리의 정신이라도 살아서 한국교회에 계속 선교의 불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우리는 각자의 손으로 쓴 빨간 글씨의 유언장을 돌아가면서 낭독했다. 눈물바다였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우리의 후원자들을 잊어버리기로 작정하면서 죽음을 넘어선 감격을 체험했다. 그렇게 한나호는 기쁨 속에서 시작됐다.
이 유언장 작성은 그후 한나호의 전통이 됐다. 지금도 한나호에 승선하는 모든 봉사자들은 헌신서에 사인을 하게 되는데 헌신서에는 ‘죽음을 넘어 순교할지라도 주님께 영광’이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