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시험 부정 약물 파문] 0.01점차 당락 좌우… 근육주사 한 방의 유혹

입력 2013-10-28 18:12 수정 2013-10-28 22:23


지난해 소방간부후보생 원서접수를 한 달여 남겨둔 10월 20일. 선발 과정을 안내하는 홈페이지 게시판에서 부정 약물이 사용되는 현실을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한 수험생이 “멀리뛰기가 너무 힘들다”는 글을 올리자 다른 수험생 A씨가 “스테로이드 들어간 약을 먹으면 된다”고 답을 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스테로이드 약을 먹으니 근력 향상이 장난이 아니다”라며 “나는 악력이 50㎏도 안 나왔는데 (약을 먹으니) 65㎏이 나오고 230㎝대였던 제자리멀리뛰기도 약 먹으면서 운동하니까 기록이 270㎝까지 향상됐다”고 밝혔다.

이런 약물은 명백한 부정행위지만 이어진 댓글에선 갑론을박이 오갔다. “스테로이드는 불법이다” “도핑테스트를 도입해야 한다” “누구나 간절히 합격을 원하는데 정당하게 붙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약 출처를 알려 달라” “체대 입시에서 많이 하는 건 알았지만 공무원 시험에도 효과가 있는 줄 몰랐는데, 나도 끌린다” “솔직히 근육주사 한 방 맞아도 괜찮을 듯” 등의 동조하는 내용도 많았다. A씨는 “공무원 시험에 도핑테스트 같은 거 없지 않느냐. 스테로이드 복용은 본인 선택이고 여러분께 도움 드리고자 정보를 제공한 것뿐”이라고 논쟁을 마무리했다.

이 토론은 공무원 시험 응시자들이 부정 약물의 유혹에 내몰리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정행위임을 알면서도 도핑테스트 등 관련 규제가 없다는 이유로 애써 정당화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게시물은 1년이 지난 지금도 홈페이지에 버젓이 게시돼 있지만 시험을 주관하는 중앙소방학교는 올 체력시험에서도 도핑테스트를 실시할 계획이 없다.

이처럼 공정 경쟁이 생명인 공무원 시험이 약물 복용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거나 이를 부추기는 일부 수험생들 때문에 복마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이들은 체력점수가 당락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데도 도핑테스트를 실시하지 않고 있는 맹점을 파고들어 시험을 불공정경쟁으로 변질시키고 있다.

취재팀은 수도권에 근무하는 임용 2∼3년차 경찰공무원 12명에게 경찰시험의 약물 복용 행태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었다. 그중 4명이 “체력시험에서 약물 복용한 사람을 알고 있다”고 답했다. 합격자들은 단기교육을 받는 경찰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으려고 약물 복용하는 교육생을 목격했다고 응답했다. 일선 경찰들 사이에서 약물복용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경찰학교 성적은 전공분야나 근무지 배정에 큰 영향을 준다.

경찰공무원 체력시험은 100m·1000m 달리기, 팔굽혀펴기, 윗몸일으키기, 좌·우 악력 테스토로 구성된다. 소방공무원은 왕복오래달리기, 윗몸일으키기, 제자리멀리뛰기, 앉아 윗몸 앞으로 굽히기, 배근력, 악력 등이다. 중등 체육교사 실기시험 역시 육상, 체조, 수영, 농구 외 선택과목 1개로 치러진다. 경찰·소방공무원은 체력시험이 전체 전형 점수의 25%, 중등 체육교사는 30%를 차지한다.

이처럼 배점이 높은 체력시험을 위해 수험생들은 혈관을 축소시켜 통증을 줄이고 근력을 강화시키는 스테로이드 주사, 약해진 인대와 힘줄 부위를 자극해 각종 영양물질과 성장인자를 모아주는 프롤로 주사 등을 주로 복용한다. 운동 속도를 높여준다는 ‘부스터’류 보조제도 인기다.

이런 약물을 투여하면 체력시험 평가항목별 기록이 일시적으로 월등히 향상된다고 한다. 한국도핑방지위원회 관계자는 “스테로이드 약물을 복용하면 근육의 단면적이 커지고 수축력도 강화돼 육상이나 기초 체력 능력에서 두드러진 효과가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현행 약사법과 관련 규칙은 난드롤론데카노에이트, 메칠테스토스테론 등 스테로이드 약물을 오·남용 우려 의약품으로 지정해 불법적인 공급을 처벌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부 병원은 뚜렷한 질병이 없는 응시자들에게 임의로 스테로이드 주사를 놔주고 있다.

수험생 사이에 일명 ‘근육주사’ 잘 놔주기로 소문난 서울의 한 병원에 전화를 걸어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을 수 있는지 물었더니 “하루 전에만 예약하면 가능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병원 관계자는 “수험생들이 시험 직전에 많이 찾아와 스테로이드 주사나 파워 주사 등을 맞는다”고 설명했다. 다른 재활 전문 병원에서는 “스테로이드 주사 말고도 (기록 향상을 위해) 맞을 수 있는 다른 주사가 많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0.01점 차이로도 당락이 갈리는 공무원 시험에서 약물 복용은 명백한 부정행위다. 수사기관이 수사에 나설 경우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처벌될 수 있다. 이렇게 출발부터 부정을 저지른 공무원에게 나랏일을 공정히 처리하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만연한 부정 경쟁을 정부 당국은 속수무책 방관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한 해 6000명가량 뽑는데 응시생 모두 도핑테스트를 하는 건 무리”라고 했다. 소방방재청 측도 “신체검사에서 혈액검사를 하지만 건강 상태를 보기 위한 것”이라며 “소방공무원법에 도핑테스트를 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다”고 해명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중등임용 담당자는 “실기시험은 시·도교육청에 일임하는데 시간·비용 때문에 약물 검사를 하는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 백남종 재활의학과 교수는 “공무원 시험 등에서 스테로이드 약물의 도움을 받는다면 근력과 집중력이 상승하기 때문에 불공정한 게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라며 “금지약물을 정해놓고 전형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경 박요진 기자 vic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