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진리 위해 목숨 던진 ‘20세기 루터’… 독일인 가슴에
입력 2013-10-27 17:25
지난 9일부터 13일까지 열린 독일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의 종교관에는 한 인물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의 모습으로 표지를 한 책을 수십 권 모아서 한쪽 벽을 채운 부스도 있었다. 바로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다. 오늘날 독일에서 차지하는 본회퍼 목사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16세기의 독일에 마르틴 루터가 있었다면 20세기의 독일에는 본회퍼가 있었다. 둘 다 철저한 개혁가(Reformer)였다. 본회퍼는 20세기 독일 출신 신학자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 한국은 물론 유럽과 북미 각국에 본회퍼학회가 조직되어 있다. 그가 잠시 머문 미국 유니언 신학대에는 본회퍼 강좌가 설립되어 있다. 국내에도 스스로 ‘본회퍼의 후예’라고 밝힌 분들이 적지 않다. 고 문익환 목사, 한명숙 전 총리, 유석성 서울신대 총장, 이정익 신촌교회 목사 등 여러 사람이 본회퍼 목사의 삶을 접한 뒤 충격을 받고 그의 뒤를 따르기로 작정했다.
1906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행복한 유년기를 지냈다. 뛰어난 피아노 연주가이기도 한 그는 1923년 17세에 튀빙겐 대학교에 입학했고 21세에 베를린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4세에 대학교수 자격을 획득한 천재 신학자다.
본회퍼는 2차 세계대전 직전 미국에서 공부했다. 미국의 친구들은 전쟁의 위험을 피해 미국에 남을 것을 그에게 강권했다. 특히 유니언 신학교의 라인홀드 니부어는 본회퍼가 미국에 머무르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본회퍼는 조국 독일 교회의 앞날과 넘어지는 양떼를 돌보기 위해 2차대전을 앞두고 귀국을 단행한다. 나치 치하에서 그는 줄기차게 평화를 외쳤으며 신앙 영역과 정치 영역의 일치를 꾀해 목사 신분으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 1943년 체포된 그는 1945년 4월 9일 새벽, 39세를 일기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스도를 알고, 부활의 능력을 믿는 믿음 가운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처럼 죽은 사람이었다.
종교개혁과 관련해 본회퍼는 수없이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39년 미국을 방문한 뒤 본회퍼는 미국의 기독교를 ‘종교개혁 없는 개신교(Protestantism without Reformation)’라고 규정했다. 그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며, 교회의 본질은 생생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 있다”고 강조했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에서 만난 덴마크의 스칸디나비안 출판사 대표 요르겐 올슨 대표는 “본회퍼는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이름이 높다”며 “그는 정말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줬다”고 말했다. 올슨 대표 말대로 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의 헌신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 요구를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뜻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것으로 “오직 믿는 자만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다”고 했다.
본회퍼가 가르친 독일의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명시적인 본회퍼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대학 내에서 만난 대부분의 학생들은 본회퍼에 대해 깊은 존경심을 나타냈다.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독일인의 가슴속에 본회퍼는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위해 진력했던 참된 신앙인’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국민일보 창간 25주년 기념 콘퍼런스 참석차 한국을 방문했던 위르겐 몰트만 박사 역시 본회퍼의 정신을 평생 내면화시킨 신학자다. 몰트만 박사는 “본회퍼는 신앙을 ‘전부를 건 행위, 생명을 건 행위로 여겼다”면서 “그에게 신앙은 죽기까지 삶을 긍정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하고, 하나님이 세상에서 겪으신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본회퍼는 생전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세 가지를 하나님께 위탁했다”면서 “나도 정말 그러고 싶다”고 말했다. 그 세 가지는 생명과 업적, 명예였다. 지금 한국교회는 신앙과 삶, 목회와 신학의 괴리 현상이 심각하다. 정체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는 듯한 한국교회를 향해 본회퍼가 말하는 듯하다. “생명과 업적, 명예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나사렛 예수를 따르십시오.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이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