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3부) 한국,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다] (30)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교회
입력 2013-10-27 17:38 수정 2013-10-28 01:23
종교개혁 발상지… 비텐베르크·아이제나흐 르포
독일 비텐베르크(Wittenberg)나 아이제나흐(Eisenach)의 루터 하우스,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 등은 마르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배우기 위해 독일 각지와 해외에서 온 방문객들로 그득했다. 아이제나흐 루터플라츠에 위치한 루터 하우스는 도시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독일 전통 가옥 중 하나다. 루터 하우스 외벽에는 색연필로 그려진 루터 가족들의 모습이 담긴 플래카드가 붙여져 있었다. 루터 하우스 내에는 종교수업의 일환으로 멀리 마인츠에서부터 온 독일 학생들이 선생님의 인솔 하에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1483년 작센안할트의 소도시 아이스레벤에서 광산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루터는 15세 때 라틴어 수업을 받기 위해 아이제나흐의 게오르크 학교에 왔다. 1501년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가게 될 때까지 루터는 아이제나흐에서 살았다. 루터 하우스 내에는 젊은 루터와 나이 든 루터 등 다양한 루터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아이제나흐에서 루터는 부친의 뜻인 법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그러나 법학 공부는 오래가지 못했고 1505년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간다.
아이제나흐 루터 하우스에 걸려 있는 젊은 시절 루터의 사진을 보면서 세상 명예를 버리고 가난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청년 루터의 심경 변화 요인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았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전승에 따르면 루터는 에르푸르트 대학생 시절 방학을 맞아 집에 오다 에르푸르트 근교인 슈토테른하임에서 벼락을 맞고 쓰러진다. 그때 루터는 순간적으로 광부들의 수호신인 성 안나를 부르며 “성 안나여, 저를 도우소서. 그러면 제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서원한다. 극적으로 그는 벼락에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갈망에 가득했던 그는 이 경험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들’을 버릴 수 있었다. 동행 했던 프랑크푸르트비전교회 장광수 목사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에 한 인간 루터의 회심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면서 “한 사람의 돌아섬을 통해 위대한 역사가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암울한 상황이어도 본질을 향한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 극적 변화와 변혁은 가능하다는 뜻일 것이다.
루터 하우스에서 지금 한국교회에도 ‘루터의 벼락 경험’과 같은 철저한 ‘임재의 체험’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만신창이와 같은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철저한 임재의 체험을 상실한 채, 겉치레의 종교성에 함몰된 것이 한국교회가 겪는 모든 문제의 시작이 아닐까 싶었다.
루터 하우스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카타리나(28)씨는 “하루 평균 100여명이 이곳을 방문한다”면서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방문객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스천이라고 밝힌 그녀는 “독일 교회도 지금 변화가 필요하다”면서 “루터의 개혁 정신이 독일 교회를 깨울 수 있기 바란다”고 말했다. 독일개신교연합회(EKD)에 따르면 독일 교회는 지난 50여년간 매년 평균 0.5%씩 신자수가 감소했다. 더군다나 명목상의 신자들이 늘어나면서 상당부분 신앙의 역동성이 상실됐다. 독일 교회도 루터의 개혁정신이 다시 필요한 상황이다.
아이제나흐 루터 하우스에서 바르트부르크 성까지는 차로 10분이 채 안 걸렸다. 주차장에서부터 성까지 10여분 더 걸어야 했다. 올라가는 길에 베를린에서 온 관광객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베를린의 한 교회 신자들로 대부분 노년인 이들은 루터의 궤적을 따라 여행 중이었다. 인솔자인 얀센 훌리프 목사는 “독일인은 누구나 마르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면서 “지금 독일에도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독일뿐 아니라 한국에도 제2의 종교개혁은 절실한 상황이 아닌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의 지시에 따라 루터는 신학을 공부하게 됐고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가 됐다. 루터는 비텐베르크에서 35년 동안 살았다. 비텐베르크에도 3층으로 된 루터 하우스가 있다. 아이제나흐의 것보다 규모가 훨씬 더 크다. ‘루터 번역 성경’ ‘95개조 선언문’ 등을 비롯해 루터가 학자들, 신학생들과 토론을 했던 방도 전시되어 있고 루터 가족의 일상을 미니어처로 재현해 놓은 방도 있었다. 관리인은 한국에서 온 언론인이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면서 입장료도 받지 않고 통과시켜 주었다. 입구 매장에는 ‘루터의 양말’ ‘루터 포도주’ 등 루터와 관련된 다양한 상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루터 하우스에서 나와 조금 걸으면 루터와 함께 개혁을 이끌었던 필리프 멜란히톤(1497∼1560)이 거주했던 멜란히톤 하우스가 보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루터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거대한 운동이었다. 멜란히톤이라는 동역자, 프리드리히 제후와 같은 지원세력의 함께하는 힘이 시대를 바꿀 수 있었다. 지금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 역시 ‘연합의 정신’이다. 멜란히톤 하우스를 둘러보며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 됨’이야말로 한국교회의 재 부흥을 가능케 하는 필수 조건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았다.
루터는 1517년 10월31일 비텐베르크에서 부패한 로마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항의 반박문을 발표했다. 종교개혁의 시발이었다. 반박문이 청동으로 새겨진 비텐베르크 슐로스 교회 정문은 공사로 인해 들어갈 수 없었다. 비텐베르크시는 방문자들을 위해 정문에 새겨진 95개항 반박문을 사진으로 복제, 교회 앞마당에 실물 크기로 세워놓았다. 슐로스 교회의 높이 솟은 원형 종탑에는 루터가 지은 ‘내 주는 강한 성이요(Der Herr ist unser starker Hort)’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 고 주기철 목사 등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던 한국의 영적 거인들이 생전에 즐겨 불렀던 곡이다. 지금 한국 교회에 널리 퍼져야 할 곡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27일 종교개혁 주일에 수많은 국내 교회에서도 불려졌을 것이다. ‘내 주는 강한 성’이라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확고한 신뢰만이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동력일 것이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를 부르짖은 루터의 그 외침이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하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인 비텐베르크는 정말 작은 도시였다. 전 도시가 루터 때문에 먹고 산다고 할 정도로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작은 곳에서 개혁이 시작되었다. 그 개혁으로 중세의 둑은 허물어지고 근대의 물꼬가 열렸다.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수많은 한계가 노정됐다. 부정적 영향도 적지 않다. 개혁으로 인해 피도 많이 흘렸다. 유대인에 대한 루터의 부족한 이해는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을 가능케 하는 원인(遠因)이 됐다. 루터와 루터의 종교개혁에도 ‘공사’가 요구된다.
무엇보다 한 세기 동안 성장일로를 걸어오다 잠시 주춤한 한국교회, 안팎으로 거센 개혁의 요구를 받고 있는 한국교회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이 지닌 건강한 측면을 계승해야 한다. 거창한 말이지만 ‘제2의 종교개혁’이 절실하다. 그 개혁은 커다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루터의 극적인 회심이 종교개혁까지 이어진 것과 같이, 소도시 비텐베르크에서의 사건이 근대의 물꼬를 연 것 같이, 작은 곳에서부터 모든 위대한 일들은 시작된다. 예수 운동은 그렇게 시작됐고 이어져왔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희망이다.
글·사진 이태형 국민일보 기독교연구소장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