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란 고통스러운 것이다. 물론 죄의 달콤함 때문에 죄를 짓지만 그 포장지 속에 있는 고통이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 고통의 위력을 알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죄의 고통을 제거해보려고 몸부림친다. 그중에 하나가 명상이다.
법정의 ‘오두막 편지’를 보면 명상에 대한 부분이 있다. 명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자세하게 소개하는데, 명상이란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냉정한 눈으로 직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감정의 변화, 생각의 변화들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라앉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 ‘가라앉는 것’이다. 마치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더러운 흙이 가라앉고 수면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여기서 얻게 되는 것이 평정이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을 보며 내가 감출 수 없었던 질문은 이것이다. ‘맑아진 그 물을 다시 휘저으면 어떻게 되는가. 다시 흙탕물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닌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에게는 공허했다. 나에게는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었다.
죄의 고통에 대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반응은 망각이다.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실 기억을 지우는 것은 죄의 고통에 대한 가장 손쉬운 반응이리라. 몇 해 전 한 일간지는 인간의 기억을 지우는 물질이 발견됐다고 크게 보도했다. 뇌세포의 기억을 촉진시키는 효소와 이 효소의 활동을 억제하는 물질을 이용해 인간의 기억을 지우거나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국 뉴욕주립대 연구팀은 이 물질을 이용해 쥐의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런데 역시 마음에 감출 수 없는 질문은 이것이다. ‘기억을 지운다고 해서 정말 죄의 고통에서 해방된 것인가.’ 가령 암덩어리를 가진 환자가 어느 날 기억상실증에 걸려서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면 그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 된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며, 옆에 있는 사람의 눈에는 오히려 더 처량하게 보일 뿐이다.
죄라는 독극물이 만들어내는 고통은 망각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라앉힌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죄를 씻어내는 샘이 우리의 앞에 있도다.’ 지난주 성도들과 함께 찬양하며 성찬을 받을 때 우리가 감격했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죄가 정말로 씻어진다니. 죄가 진짜로 없어진다니. 그 사실 앞에 우리는 다시 한번 감격했다. 가장 위대한 기적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내 기억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로 죄는 없어져버렸다. “아니, 내 기억에는 분명히 있는데 어떻게 없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다. “기억에 있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 기억에는 있어도 없어졌으면 없어진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이와 같이 반문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바로 여기, 복음 안에 있습니다.”
<서울 내수동교회>
[박지웅 목사의 시편] 죄를 씻어내는 샘
입력 2013-10-27 17:10 수정 2013-10-27 2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