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예술인들 협동조합] 함께 그리고 함께 노래하고… 예술, 할 만하네

입력 2013-10-26 04:01

지난달 서울 구로동의 갤러리 ‘신도림예술공간 고리’에서 이색 전시회가 열렸다. ‘룰루랄라예술협동조합’이 주최한 ‘얼굴&페이스북’전(展)은 시민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과 사연을 토대로 조합 소속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어 전시했다.

사진을 그대로 모사한 그림부터 이야기를 담은 독창적 이미지까지 다양한 작품은 그 가격도 독특했다. 작가들은 작품을 사려는 이에게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책을 달라”거나 “당신의 시간을 나를 위해 써 달라”는 식으로 ‘값’을 제시했다. 물론 현금으로 팔린 작품도 있다. 한 구매자는 좋아하는 원로작가의 그림에 흔쾌히 700만원을 냈다.

협동조합이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하고, 책을 만든다. 사회의 무관심과 불합리한 관행 등에 어려움을 겪는 예술인들이 협동조합을 발판 삼아 자활을 모색하고 있다. 음악 미술 연극 출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그날을 꿈꾸며 ‘자립 실험’을 하는 중이다.

대중은 예술에 관심이 없다고?=룰루랄라예술협동조합은 올 3월 설립됐다. 소수 부유층 고객에 의존하는 미술계 관행을 깨고 새로운 대중 소비층을 만들어 보자며 출범했다. 화가 조각가 등 60여명이 참여하고 있다. 20대 신인부터 70대 원로까지 다양하다.

나규환 상임이사는 “대중이 예술에 관심 없다고 하지만 서울시립미술관 샤갈 전시회가 북적이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며 “기획만 좋다면 전통 방식을 벗어나 작가와 대중이 더 재미나게 소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룰루랄라조합은 지금까지 6차례 전시회를 열어 매번 3∼5점 작품을 판매했다. 다음 달에도 2차례 기획전을 준비 중이다. 전시 공간도 기존 갤러리를 벗어나 서울시의 ‘시민청’ 같이 대중적 소통이 가능한 장소를 주로 선택한다.

젊은 작가와 원로 작가 사이의 단절을 없애는 것도 협동조합의 또 다른 목적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들이 함께 작업하며 철학과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재 준비 중인 ‘꽃할배전’은 60∼70대 원로화가들을 모델로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고 있다.

앨범 제작비, 800만→80만원=인디 음악인들의 ‘자립음악생산자조합’은 2010년 서울 동교동의 작은 칼국수집 ‘두리반’에서 비롯됐다. 철거 위기에 몰린 이 칼국수집을 돕기 위해 홍익대 부근 인디밴드들이 ‘51+’ 공연을 열었다. 5월 1일 51팀의 밴드가 무대에 선 공연은 관객 2500여명이 몰려 성황을 이뤘고, 여기에 참여했던 밴드 중 일부가 조합을 결성했다.

음악인들은 재개발 사업에 힘없는 칼국수집이 내몰리는 걸 보면서 자신들과 처지가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고 한다. 자립음악조합 황경하 운영위원은 “영세한 공연장은 두리반처럼 계속 문 닫는 상황이었다”며 “잘 팔릴 음악은 아니지만 그래도 가치가 있다고 믿기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고 말했다.

조합은 2011년 5월 발기인 대회를 갖고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200여명이 매월 5000원씩 조합비를 낸다. 조합원 중에는 음악인이 아닌 팬들도 많다. 협동조합 등록은 아직 준비 중이다. 대표적 사업은 음반 제작비 지원. 팀당 최대 50만원까지 마이크로크레딧 형식으로 대출한다.

인디 음반 제작비는 보통 400만∼500만원인데 조합원들은 정보 공유를 통해 100만∼200만원까지 낮추고 있다. 이런 절약이 가능하도록 조합은 음반제작 교육도 해준다. 단편선 운영위원은 “나도 첫 앨범에 800만원 썼는데 두 번째는 80만원만 들였다”며 “어차피 500∼1000명 상대로 팔릴 음악이니 비용의 최소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회기동 단편선’ ‘야마가타 트윅스터’ ‘404’ 등 조합원 밴드들은 대부분 대중음악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음악을 하고 있다. 황 위원은 “장르를 규정하기도 어려울 정도”라며 “이런 음악을 통해 대중음악계와 다른 새로운 음악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벽화에 QR코드… 아이디어로 관행을 깬다=백희나 작가의 그림책 ‘구름빵’은 2004년 출간 이후 40만권이 팔리는 대성공을 거뒀다. 2005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됐고, 뮤지컬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박근혜 대통령까지 트위터에 구름빵 캐릭터를 올렸다. 하지만 정작 백 작가는 작품과 2차 저작물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 저작권과 출판권을 출판사가 갖도록 계약이 이뤄졌다.

‘그림책작가협동조합’은 이렇게 불합리한 출판계 관행을 개선하고자 지난 6월 설립됐다. 권오철 이사는 “저출산으로 그림책 수요가 줄어드는 데다, 편당 6개월에서 1년이 소요되는 작품의 인세가 고작 200만원인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조합을 만들었다”고 했다.

협동조합이 출판사 역할을 대신해 인세를 20%대로 높이고 수익도 조합원 복지에 활용한다는 것이다. 화가 작가 아트디렉터 편집자 등 조합원들이 분업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 역시 높일 수 있다.

활동 영역은 그림책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들은 티셔츠, 가방, 휴대전화 케이스, 나무 공예품 등 팬시상품을 제작해 팔기도 한다. 또 대기업과 함께 서울 동자동 쪽방촌 벽화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벽화에 ‘QR코드’를 담아 스마트폰으로 스캔하면 작품의 사연을 보고들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권 이사는 “한국 창작 그림책의 역사는 불과 20여년이지만 품질은 매우 뛰어나다”며 “볼로냐 도서전 등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어 협동조합의 성장 가능성도 크다”고 말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