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서울시의 ‘뒷짐’ 홍보
입력 2013-10-25 18:56
이번 주 내내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30년 전쯤 본 영화가 새삼스럽게 생각난 것은 한 마디 대사 때문입니다. ‘네 죄목은 인생(청춘)을 낭비한 것이다.’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빠삐용. 그의 꿈에서 재판관은 ‘살인은 무죄지만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흉악한 죄를 지었다’며 이런 판결을 내리지요.
지난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여의도에서 서울시 주최로 ‘2014 봄여름 서울패션위크’가 펼쳐졌습니다. 3월과 10월에 개최되는 이 행사의 꽃은 ‘서울컬렉션’입니다. 이번 컬렉션은 서울시와 패션디자이너연합회(CFDK)가 공동 주최했습니다. 서울시 주관 패션쇼는 IFC서울에서, CFDK 주관 패션쇼는 여의도공원 문화광장에 세운 대형 텐트에서 진행됐습니다. 패션을 십수년째 취재하고 있는 기자에게 이번 서울컬렉션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국내 컬렉션은 1990년 11월 국내 정상급 디자이너 모임인 한국패션아티스트협의회(SFAA) 주최로 시작됐습니다. 세계 4대 컬렉션의 하나인 뉴욕컬렉션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됐지만 수주가 거의 이뤄지지 않아 ‘절반의 행사’라는 질타를 받았습니다. 컬렉션은 2·3월에 그해 가을 겨울, 9·10월에 그 이듬해 봄여름 옷을 패션쇼를 통해 선보여 유행 경향을 제시하고 바이어들의 주문을 받는 행사이기 때문이죠.
2010년 10월 서울시가 세계 5대 컬렉션으로 육성해 패션산업을 부흥시키겠다는 다부진 계획 아래 서울컬렉션을 시작하면서 해외 바이어와 패션 기자들을 초대했습니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은 별도의 컬렉션을 했습니다. 2003년 봄 처음으로 통합 컬렉션을 치렀지만 그해 가을 다시 분리됐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10여년간 합쳐졌다 갈라섰다 하던 양 진영이 올 가을 공동 주최로 뭉쳤으니 기대가 클 수밖에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지난 월요일 텐트 한쪽에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게 뭐야! 남과 북으로 갈린 것도 아니고. 해외 바이어와 프레스(기자)를 왜 이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거야!” 한 디자이너가 평소 알고 지낸 해외 바이어로부터 ‘공원 쪽 쇼에 가지 못하게 한다’는 귀띔을 들었답니다. 국내 패션 전문지 기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털어놨습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이와 관련, “절대 그런 일 없다. 본인들이 가지 않는데 등 떠밀어 보낼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서울패션위크 영문 안내책자를 내밀었습니다. 그 책자에는 CFDK 주관 쇼도 확실히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보니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서울시 측에서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공동 주최’라는 문구가 아예 없었습니다. 또 해외 바이어와 기자들을 위한 라운지에 붙어 있는 컬렉션 일정표에도 CFDK 주관 쇼는 소개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해외 초청 패션 컨설턴트에게 ‘여의도공원 쇼도 보았느냐’고 묻자 “모른다. 하고 있다고 해도 나는 서울시에서 초대받았기 때문에 그곳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해외 바이어와 기자들이 CFDK 주관 쇼에 가지 못하도록 서울시 관계자들이 방해했다는 물증은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허물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같이 형편이 어려운 때 허리띠 졸라매며 냈을 서울시민의 혈세로 초청한 해외 바이어와 취재기자들입니다. 이들이 패션쇼 하나라도 더 볼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를 해야 했습니다. 등을 떠밀어서라도 보내야 했습니다. 참관 방해는 무죄지만 서울시 공무원으로는 흉악한 죄를 지은 게 아닐까요. 서울시 관계자들의 죄목은 서울시민의 세금을 낭비한 것입니다. 컬렉션의 반쪽만 봤을 해외 바이어와 기자들의 반응이 걱정됩니다.
김혜림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