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영성] 환대의 능력

입력 2013-10-25 17:44

이집트의 수도사 안토니는 바깥세상과 담을 쌓은 고립된 은둔자가 아니었다. 주변에 수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디라도 지혜로운 벌처럼 찾아 나섰다. 그가 만난 선배들은 각각 자신만의 장점을 지닌 사막의 꽃들이었다. 안토니는 그들과의 만남들을 통해 수도사들의 특성을 배우고 적용해 최선의 덕이 자신 안에 나타나도록 노력했다.

주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세월이 흐르면서 안토니의 선배 찾기는 하나의 전형이 되었다. 수도사들은 시간의 절반을 자기 수실에서 기도와 노동으로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고명한 원로를 찾아가 배우는 구도여행에 사용했다. 4세기 로마제국의 일반 교육이 개별 학교에 학생이 찾아가 배우는 방식이었음을 생각하면 수도사들은 사막의 학교를 찾아간 셈이다.

수도사들은 스승을 찾아 홀로, 둘이서, 혹은 그룹으로 걷기도 하고 배를 타기도 했다. 몇 날이 걸리는 먼 여행에서는 사막에서 길을 잃고 때로는 기아와 갈증으로 죽기도 했다. 그러나 배움이 주는 유익 때문에 수도사들은 여행을 중단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발달한 것이 환대문화였다. 손님을 잘 대접하는 것은 수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였다. 그들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주님이 찾아오신 것과 같다고 믿었다.

주께서 최후 심판 때에 의인들에게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5, 40)고 칭찬의 말씀을 하셨던 것을 그들은 기억했다. 환대는 종말의 운명이 달린 행위 가운데 하나였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수도사들은 사막을 가로질러 먼 길을 온 지친 손님에게 음식부터 제공했다. 이때는 작정 금식 중이더라도 식사를 함께 했다. 한 원로를 방문한 수도사가 이를 알고 “아버지여 제가 당신의 규칙을 깨트렸으니 저를 용서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원로는 “나의 규칙은 형제를 환대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를 평안히 가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두 수도사가 원로를 방문했다. 그 노인은 금식하고 있었는데 손님을 맞자 중단하고 기쁨으로 음식을 대접했다. 그는 “금식에는 상급이 따릅니다. 그러나 남을 대접하기 위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 사람은 두 가지 명령을 지키는 셈입니다. 첫째는 자신의 의지를 버리게 되며, 둘째는 사랑의 계명을 성취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원로들은 손님이 떠나면 다시 금식을 시작해 먹은 횟수만큼 더 늘려 작정한 금식을 마무리했다.

이러한 환대는 찾아오는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제공되었다. 아무리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도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방문자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든, 무슨 사상을 갖고 있든 내가 좋아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받아들이고 대접했다.

사막에 한 원로 수도사가 살았다. 그 수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마니교 사제가 살고 있었고 서로를 알고 있었다. 하루는 마니교 사제가 동료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 한밤중에 원로가 사는 곳에 도착했다. 더 이상 길을 갈 수 없어서 망설임 끝에 수실 문을 두드렸다. 원로는 기쁘게 맞아주었고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고 기도가 끝난 후 음식을 대접하고 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마니교 사제는 “이 사람은 어떻게 나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단 말인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자 마니교 사제는 “지금부터 저는 기독교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함께 살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페르시아 원로 수도사 요한은 악한 사람들이 찾아왔을 때 대야를 가져다가 그들의 발을 씻어주려 했다. 당황한 그들은 마침내 참회를 하기 시작했다. 사막의 교부들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가장 좋은 길, 즉 환대의 능력을 알았다. 모든 사람은 환대를 좋아하고 그것을 느낄 때 귀를 열어 경청하고 자신을 내어준다.

WCC에 빚을 갚을 때

다음주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가 열려 많은 손님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다. 우리는 과거에 WCC에 큰 빚을 졌다. 북한이 6·25전쟁을 일으키자 WCC는 국제단체 중 가장 먼저 남침을 규탄하고 유엔의 적극적 개입을 요청했다. 또 한국민을 구호하는 것은 전 세계 교회들의 도덕적 의무라고 강조하며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는 일에 헌신했다. 당시 WCC의 식량 지원은 유엔보다 많았다. 이것만으로도 훈장을 주어야 할 일다.

은혜를 입었던 한국교회와 정부는 결코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한다. WCC의 어제의 환대에 대해 우리는 오늘의 환대로 응답할 책임이 있다. WCC에 대한 이해가 무엇이든지간에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는 조건 없는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김진하 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