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최정식] 장기기증은 또 다른 영성수련 수술의 고통 십자가 고난만 하겠습니까

입력 2013-10-25 17:44

‘생존시 최다 장기기증인’ 사색출판사 대표 최정식 목사

1993년 7월, 생판 모르는 남을 위해 병원 수술대에 올랐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는 동갑내기 여성에게 신장을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어른 손 한 뼘만한 수술자국이 어느새 배 위에 남았다. 의사는 회복을 위해 1∼2주간 입원해 치료받아야 한다고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후회는 없었다. 온통 ‘이 상처로 한 사람이 생명을 얻었구나’란 생각뿐이었다.

이후로도 그는 몸의 일부를 계속 남에게 떼어줬다. 93년 신장을 시작으로 2003년에 간을, 2006년엔 조혈모세포를 기증했다. 헌혈도 꾸준히 했다. B형간염 바이러스가 몸 안에 침입한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헌혈이 금지되기까지 헌혈을 해 헌혈증 186장을 받았다. 2006년엔 췌장 기증 등록을 해 지금껏 기증 받을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는 ‘생체 최다 장기기증인’인 사색출판사 대표 최정식(53) 목사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4일 34년간 헌혈을 비롯, 장기기증을 해 생명 나눔에 기여한 공로로 최 목사에게 ‘2013 대한민국 나눔국민대상’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2005년 적십자 박애장 금장에 이어 큰 상을 받았지만 정작 그는 무덤덤했다. 지난 22일 기자와 만난 최 목사는 “나 말고도 신장과 간을 기증한 사람이 30명 정도 있다. 이분들 모두 같이 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생전 장기기증을 했다는 그는 자신의 행위 앞에 붙는 ‘희생’ ‘이타심’이란 표현을 부담스러워했다. 장기기증 동기를 재차 묻자 최 목사는 ‘황금률’로 유명한 성경 구절을 인용해 답했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섬김과 봉사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남다른 삶

그의 생명나눔 활동은 고3이던 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에 온 헌혈차에서 처음 헌혈을 한 최 목사는 그때부터 격주마다 혈액 기부를 시작했다. 학교 시험기간에도 인근 헌혈의 집에 찾아가 헌혈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헌혈자에게 주어지는 여러 혜택 때문에 한 건 아니었다. 그는 따끔한 주사 한방으로 피를 나눠줄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꼈다.

모태신앙이던 최 목사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으로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그의 인생관을 바꾼 스승을 만난다. 개신교 종교철학가로 유명한 다석 유영모의 제자 고 김흥호 전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와 개신교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을 설립한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이 그들이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불선을 아우르는 김 교수의 지식과 고아, 과부, 행려병자를 거둔 이 선생의 삶에 매료된 그는 92년 학교를 졸업하고 은성수도원에 들어갔다.

“대학생 때 책으로 접한 이현필 선생의 삶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요즘 기독교인이 따라가지 못한 영성가이자 실천가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기독교인이라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유영모, 이현필 선생의 삶을 좇아 1일1식을 하고 4시간씩 자며 영성수련을 했지요.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사신 이 선생을 닮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기로 뜻을 굳혔고요.”

남다르게 살기로 결심한 그였지만 수도원에선 갈고 닦은 영성을 실천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1년간의 수련생활을 마치고 서울 청량리 다일공동체에서 봉사를 하던 그는 우연히 그가 다니던 영락교회에서 한 유인물을 접한다. 교인에게 장기기증을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몸속에서 신장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잘 몰랐던 최 목사는 93년 3월 기증 서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그해 7월 신장 기증을 했다.

“좋은 일이라 생각해 기증 서약을 한 것뿐입니다. 내 배를 가르고 장기를 주는 일이지만 특별히 남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수술 뒤엔 신장 한쪽이 없다는 사실도 곧 잊게 되더라고요.”

고난 속의 영성

수도원 영성을 삶에서 실행하고자 했던 최 목사에게 장기기증은 또 다른 ‘영성수련’이다. 그는 수술 후 고통을 느끼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고난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수술을 하고 나면 한 2주 동안은 배가 아파요. 회복 기간에 TV를 보며 키득거리는데 배가 흔들려서 그런지 무척 아팠어요. 그 순간 죄 없는 예수님이 당한 십자가 고난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십자가 고난을 맛보게 해 달라고 40일 금식기도를 두 번 했다는데, 보통사람인 제가 이런 고통을 받으니 얼마나 특별한 경험입니까. 물론 비할 바는 안 되겠지만 장기기증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체험할 수 있다는 데 보람을 느꼈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 한 생명을 살렸다는 생각이 그를 강심장으로 만든 것일까. 2003년 최 목사는 간 기증을 위해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한 스님이 신장을 기증한 뒤 연이어 간 기증자가 됐다는 뉴스를 본 게 계기가 됐다. 다시 장기기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 목사는 2003년 10월 서약서를 제출했고 한 달 뒤 간 기증 수술을 받았다.

두 번째 기증 수술에 대한 가족의 반대는 컸다. 가족들은 몰래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가족 동의를 위해 수술 며칠 전에만 알리는 최 목사를 걱정하는 눈길로 바라봤다. 특히 어머니의 걱정이 심했다. 그의 어머니는 1일1식을 하는 그가 혹여나 쓰러질까 누차 헌혈을 말려왔었다. 이 때문에 최 목사는 어머니 대신 형에게 가족 동의서에 서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형은 신장 수술에 기꺼이 서명했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간 기증 수술을 앞두고 대기하던 형은 의사가 예정보다 늦게 오자 잘됐다며 병원을 나가버렸다. 하는 수 없이 최 목사는 스스로 서명하고 수술대에 올랐다.

“가족간에 장기기증을 할 때도 수술 전 안 하겠다고 도망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수술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전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은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옵니다. 전 하나님 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만약 수술받다 죽어도 걱정할 건 없다고 주변에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 곁에 가는 것이니까요.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고 생명 사랑만 남더군요.”

한 생명을 살리는 데 희열을 느낀 최 목사는 2005년 골수도 기증했다. 2000년 한국조혈모세포은행에 기증 서약을 했는데 6년 뒤에야 그의 골수와 맞는 환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뛸 듯 기뻤다. 환자와 기증자 간 골수가 일치할 확률은 2만∼2만5000명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희박한 확률 탓에 기증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들이 많은데, 운이 좋아 새 생명을 선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백혈병에 걸린 고등학생을 위해 최 목사는 1000㏄의 골수를 기증했다. 수술 이후 한국조혈모세포은행으로부터 기증받은 학생이 건강히 잘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듬해엔 췌장 이식 서약을 했지만 7년째 소식이 없다며 아쉬워했다. 생체 이식을 3회 한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 수술을 진행하지 않는 것 같다고 최 목사는 예상했다.

“우리나라는 뇌사 기증이 적어 장기가 항상 부족합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살아있는 이들이 장기기증을 하는 생체 이식이 많은 편이에요. 그런데 기증자 건강 등 여러 이유로 이제는 생체 이식을 잘 안 하려고 해요. 저 역시 더 할 수 있고, 할 의지도 있는데 진행을 안 해줍니다. 굳이 위험성을 안고 진행하지 않으려는 거죠. 하지만 원래 기증은 아프고, 위험한 것 무릅쓰고 하는 거예요. 이것저것 따지면 절대 못합니다.”

구도자

2006년 이후 그는 더 이상 헌혈도, 장기기증도 할 수 없다. 그의 장기가 필요한 환자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B형간염 흔적 때문에 헌혈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B형간염에 걸린 것도 아니고, 바이러스가 들어왔다 나간 것뿐인데도 혈액의 안정성 때문에 헌혈할 수 없다고 하더군요. 백신을 접종해 몸 안에 항체도 생겼지만 그래도 안 된다고 해요. 20여년간 1일1식하며 생체 이식이 가능할 정도로 최고의 몸 상태를 유지해 왔는데 그저 아쉬울 뿐이죠.”

장기기증이 어려운 상황임에도 최 목사는 홍보 캠페인에 참여해 생명나눔 활동을 계속한다.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마다 대학로에서 조혈모세포 기증 캠페인에 참여하고 헌혈 캠페인에도 꾸준히 참여한다. 장기기증이나 헌혈을 자주 해도 몸이 건강하다는 걸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다. 여러 번 수술대에 올랐음에도 아픈 곳 없는 그는 헌혈과 장기기증을 결심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한 생명을 살리는 듯한 기쁨을 느낀다고 했다.

94년 필리핀 마닐라신학대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200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최 목사는 교회 목회는 오래 하지 않았다. 어려운 이를 돕는 데 더 관심이 많았던 그는 2002년 숭실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다. 2년 만에 졸업했지만 그는 3년간 수업을 청강하며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 청소년부터 노인복지까지 모두 섭렵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공부를 마친 최 목사는 떡집 운영, 오가피차 판매, 요양센터 운영 등 여러 일을 했다. 그의 꿈인 무료 요양원 운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키 위해서였다. 현재는 출판사 대표로 은사인 고 김흥호 교수의 저서를 출간하고 있다. 수익보다는 동서양 종교와 철학을 아우르는 김 교수의 저작을 기리기 위해 출판한다고 했다.

경제적 형편은 넉넉지 않지만 나누는 마음만큼은 풍요로웠다. 매년 한두 번 동대문 도매상에게 반품된 여름옷을 받아 베트남과 캄보디아 어린이들에게 전달한다. 작년엔 요르단 어린이를 위해 옷가지를 모아 보냈다. 2011년엔 이화여대 대학교회 성도들과 캄보디아로 의료 선교를 다녀오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은 아니지만 최 목사는 크게 걱정하며 살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약자를 돕기 위해 일한다는 말도 자신에겐 거창하다고 했다. 목회를 안 하고 사회복지사 일을 하지 않으니까 되는 대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언젠가 무료 요양원을 짓고 개척교회도 할 수 있겠지만 후원금으로만 충당할 수 없으니 훗날을 위해 종잣돈을 마련 중이라고 했다.

“목사가 말할 때마다 동서양 고전을 즐겨 인용하고, 1일1식을 하고 금욕생활을 하는 데다 여러 일을 전전하는 게 독특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욕심을 버리는 삶이 예수님을 더 닮는데 유리하다고 봐요.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영성이 더 가치있는 법이죠. 앞으로도 구도자적 삶을 살며 내것을 이웃에게 나누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겁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