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질 받던 마녀 교회 마마로 박수를 받다

입력 2013-10-25 17:25 수정 2013-10-25 00:37

지적장애 선수 이끌고 ‘한국판 쿨 러닝’ 기적 만든 ‘모리타니 마마’ 권경숙 선교사

무더운 아프리카 땅에서 겨울 스포츠 봅슬레이를 연습하고 올림픽에까지 출전한다는 꿈같은 이야기를 담은 미국 영화 ‘쿨 러닝(Cool Runnings)’. 지난 1월,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펼쳐졌다.

‘한국판 쿨 러닝’의 감독은 50대 한국인 여성. 2013 평창 동계스페셜올림픽에 모리타니 대표단 단장으로 네 명의 지적장애인 선수를 이끌고 온 권경숙(53) 선교사다. 메달보다 올림픽 참가에 의미를 두고 나왔는데, 첫 출전에서 더 영화 같은 일을 내고야 말았다. 스노슈잉 남자 100m에서 빌라리 뎀벨레(22)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 스노슈잉은 스노 슈즈를 신고 눈밭을 달리는 경기이다.

지난 12∼13일 서울 양천구 신정동 목민교회(김동엽 목사)에서 열린 ‘홈커밍선교대회’ 참석차 8개월여 만에 한국을 찾은 권 선교사를 최근 만났다. 사하라 사막 서쪽 끝에 위치한, 지독히도 가난한 나라 모리타니에서 그녀는 사막보다 더 뜨거운 삶을 살고 있었다.

모래보다 더 뜨거운 열정으로

올림픽 이후 네 명의 선수는 수도인 누악쇼트로 갔다. 두 명은 세차 일을, 다른 두 명은 양을 키우고 있다. 사실 ‘덩치 큰’ 지적장애 청년들을 선수로 키운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 게다가 타들어가는 모래 위에서 스키를 탄다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모든 게 난센스다.

“지난해 9월 제가 사역하고 있는 장애인센터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한국에서 스페셜올림픽이 열리는데 마마가 가서 모리타니를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거였지요. 그렇게 단장을 맡고 선수 선발에 나섰습니다.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는 청년들로 뽑았지요. 낮에는 모래가 너무 뜨거워 밤에 매일 세 시간씩 모래 언덕에서 스키 타는 훈련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스노슈즈도 사왔고요.”

평창에 도착한 선수들의 첫 마디는 “여기 모래는 희고 차갑다”였다. 몇 번 눈길에서 넘어진 뒤로는 춥다며 꼼짝하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좋은 기억만 안고 돌아왔습니다. 목사님들이 삼계탕을 사줬는데 맛있다며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합니다. 수도로 옮겨 얼굴을 볼 수 없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연락하고 지냅니다. 처음 ‘예수쟁이’에게 아이들을 맡길 수 없다고 했던 가족들도 많이 변했고요. 모두 하나님이 만든 기적입니다.”

권 선교사는 수도에서 540㎞ 떨어진 항구도시 누아디부에서 사역하고 있다. 1992년 12월 유럽여행 중에 모리타니를 방문한 그는 온통 사막인 것을 보고 서원했다. “하나님, 여기에도 사람이 삽니까? 만약 저 땅에 사람이 살면 그 생명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94년 11월 예장통합 파송 선교사로 모리타니에 정착했다. 모리타니의 공식 명칭은 ‘모리타니 이슬람공화국’. 처음 땅을 밟고 그가 한 일은 시장을 돌며 나직이 찬송을 부르는 거였다.

150㎝의 작은 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짧은 머리를 했다. 늘 주머니 많은 바지를 입고 다녀 처음엔 그를 “무슈(아저씨)”라고 불렀다. 이듬해 결혼하고 남편과 함께 본격적으로 선교 사역에 뛰어들면서 그는 ‘크리스천 마담’으로 불렸다. 남편의 재정 지원으로 비교적 규모가 큰 집을 얻어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강대상, 의자 등 교회 성물도 남편이 직접 만들었다. 아들을 돌보는 일까지 모두 감당해줘 권 선교사는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찬양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아잔(이슬람 신도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아닌 찬양을 들으면 마음이 편하다는 겁니다. 글을 모르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지고 영어, 프랑스어를 가르쳤고요. 먹을 것도 나눴습니다. 제게 글을 배운 이들이 ‘쪽복음’을 전하더라고요.” 권 선교사는 몸으로 실천했다. 창녀에게 요리를 가르쳤고, 남편은 현지인 아버지들을 대상으로 ‘가장이 바로 서야 한다’며 정신교육을 시켰다. 특히 숭어를 잡아 요리해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먹였다. 아픈 이들을 보면 들쳐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저보다 더 열심인 남편을 보면서 그의 직분이 무엇일까를 많이 생각했었죠. 남편이 있었기에 몸은 힘들어도 제겐 평안이 넘쳤습니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교회 운영비로 돈이 바닥나자 선원이었던 남편이 다시 배를 타러 나갔다. 그리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갑작스레 떠난 남편. 부부가 같이 산 세월이 3년이 채 안 됐다. “하나님께도, 아내에게도 최선을 다한 신실한 사람. 아들의 아버지로서도 최고였다”며 남편을 떠올렸다.

하늘 가는 그날까지 ‘모리타니 마마’로

옆에서 지켜주던 남편이 없자 생각지도 못한 어려움들이 밀려왔다. 3000평 농장을 일궈놓으면 주변 무슬림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경찰들이 틈만 나면 예배당에 들이닥쳐 교인들을 마구 잡아갔다. 몽둥이로 때리거나 불도 질렀다. 에이즈에 걸린 현지인들을 돌보다 그들이 죽으면 ‘저주받은 교회’라고 돌을 던졌다. 급기야 ‘교회 마담은 남편을 죽인 것도 모자라 교인까지 죽이는 대마녀’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런데 참 희한했다. 핍박을 받을수록 교인 수는 늘었다. 오히려 “당신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나. 교회 마담은 먹을 것을 준다”며 몽둥이를 맞으면서도 권 선교사 편을 들었다.

어느새 그가 가는 곳에는 은혜로 채워졌다. 창녀였던 여인이 권 선교사의 도움을 받고 사업가로 성공했다. 악질 죄수가 복음을 듣고 문맹의 수감자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권 선교사는 버림받은 장애인과 창녀, 빈민, 죄인들을 품었다. 현지인들은 그를 ‘마마’로 불렀다.

권 선교사는 현지 건물을 빌려 장애인센터, 유치원 등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두는 대상은 어린이다. 태권도, 축구를 가르치며 500여 어린이들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있다. 그는 아이들을 통해 모리타니의 미래를 구상한다. “어린이들만 말씀으로 제대로 양육한다면 그 땅에 소망이 생길 것입니다. 그게 제 마지막 사명입니다.”

현재 권 선교사의 몸 상태는 최악이다. 부신낭종, 담낭암 수술을 받았다. 심근경색에다 당뇨병도 있다. 20년 전보다 키가 7㎝나 줄었다. 손가락 펴는 것도 힘들다. 이번엔 만성치주염으로 앞니를 뽑아야 하는데, 지혈이 안 된다고 해서 관뒀다. “수술한 뒤로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당뇨 때문에 음식을 조절한답시고 김치와 밥만 먹었더니 영양실조까지 왔습니다. 병원에선 입원해 더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는데 마냥 있을 수도 없고….”

한국에 오자마자 장애인센터에서 일하던 하메드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게 못내 가슴 아픈 모양이다. 이제 겨우 스물네 살. 권 선교사가 결혼시켜 두 달 전에 예쁜 딸도 얻었다. “나올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라며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모리타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지난 21일 그는 선교지로 돌아갔다. 건강이 염려됐다.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으로 그 땅을 깨울 때 가장 행복하다는 권 선교사는 요즘 믿음을 드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를 생각한다고 했다. “아파서 못 일어날 때가 많아졌거든요. 당뇨 때문에 눈도 좋지 않아 어떨 땐 성경도 못 봅니다. 지금 말씀을 읽을 수 있을 때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야 합니다.”

24일 권 선교사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영양제 열심히 챙겨먹고 있습니다. 하메드의 어린 아내를 붙잡고 기도해줬어요. 이제 제가 하메드 대신 그 아내와 딸을 보살펴야 합니다.”

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