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노트-오인숙] 촌로(村老)와 목사
입력 2013-10-25 17:28
어느 시골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노인은 자식들을 다 출가시키고 아내와 그런대로 정을 나누며 살았다. 그런데 아내가 어느 날 훌쩍 세상을 떠나 버렸다. 노인은 마루에 상청(喪廳)을 차려놓고 소주 한잔 마시고 상청 옆에 쪼그리고 누워 울곤 했다. 마을 언덕 작은 교회의 목사가 불쑥 찾아왔다. 전도하다가 부부에게 푸대접을 받던 목사였다. 목사의 등을 마구 밀어내며 내쫓던 건 아내가 더 심했었는데 웬일인지 아내가 죽기 전 병원에서 사돈의 전도로 예수를 믿었고 엉겁결에 마을 목사가 장례를 치러주었었다.
목사는 밤이면 슬그머니 노인을 찾아왔다. 노인은 모른 척 마루에서 술을 마셨고 목사는 노인에게 별 말 없이 “식사는 하셨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노인 곁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노인이 마루에서 쪼그리고 잠이 들면 방에 들어가 이불을 꺼내 와서 덮어주고 자신은 마루 옆 골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새벽 4시가 되면 목사는 슬그머니 일어나 새벽기도를 하러 교회로 올라갔다. 목사는 매일 밤 노인의 집에 와서 한 달간 잠을 자고 갔다.
노인은 도시에 사는 딸이 찾아왔을 때 제일 먼저 목사 이야기를 했다. “예수쟁이” 대신 “그 양반”이라고 했다. 노인의 딸에게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함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함께하려면 공감해야 한다. 보이는 행동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공감해야 한다. 노인이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얼마나 허전한지를 목사는 노인의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옆에 있어 주었다. 목사는 자신의 편견이나 신앙의 신을 벗어버리고 노인의 신을 신었다.
상대에 대해 공감한다는 것은 먼저 ‘내가 신은 신을 벗는 것’이라고 한다. 내 발에 편하다고 상대의 발에도 맞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상대를 주장하려 하며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사랑은 나의 신을 먼저 벗는 일에서 시작된다. 내 주장이 들어간 사랑의 방식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주고받으면서도 서로 상처를 받는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돼라.”(벧 5:3)
오인숙(치유상담교육연구원 교수·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