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우리 앞의 나사로를 보라

입력 2013-10-25 17:15


누가복음 16장 19∼25절

주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자신들은 그런 일을 행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대답은 놀랍게도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였습니다. 결국 주님은 ‘굶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든 채 살아가는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을 다시 살펴봅시다. 굶주리고 헐벗은 나사로는 주님입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던’ 부자는 자기 집 앞에 쓰러져 있는 주님, 음식을 구걸하는 주님, 상처난 곳이 헐어 개들에게 시달리고 계신 주님, 헐벗은 주님을 방치한 것입니다. 부자는 자기 집 문을 드나들며 나사로의 비참한 모습을 수백 수천 번 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두 번은 호기심으로 쳐다봤을 수 있고, 남은 음식을 몇 번 가져다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부자의 관심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설교자인 요한 크리소스톰은 자신의 책 ‘부자(富者)’에서 이 본문으로 설교하며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는 것은 가난한 자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며 생계수단을 빼앗는 것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본문에 함의된 부자의 책임과 의무를 말한 것입니다.

물론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개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어떻습니까. 여전히 지구촌 사람의 75% 이상은 하루에 단돈 만원 이하로 살고 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은 2000원 미만으로 살아가며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분명 이 세상의 수많은 ‘나사로’들에 비해 ‘부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의 수많은 ‘부자’ 교회와 ‘부자’ 그리스도인들의 시선, 마음, 걸음 그리고 물질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오늘 다시 우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외면한 채 계단을 올라 우리끼리의 잔치를 벌인다면 죽어가는 나사로를 돌아보지 않아 책망받았던 부자의 전철을 밟는 것이 아닐까요.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을 부르며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풍요로운 우리 삶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로 5살이 채 안된 자녀를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잃고 있는 사람들, 기본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지 못한 채 파괴적인 가난과 끝 없는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과연 이 세상은 참 아름다울까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찬송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와 그들의 처지가 뒤바뀌어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감사의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외면해도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오늘도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앞에 실존하는 나사로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실까요? 너무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25:45) 이 말씀 가운데 녹아 있는 주님의 눈물과 아파하시는 마음을 깨달아 돌이키는 ‘부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황성빈 목사(월드비전 크리스천 커미트먼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