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성명 태풍'에 휘청이는 정국…대선불복 vs 헌법불복
입력 2013-10-25 04:49
민주당 강경파 초선의원들 내각 총사퇴 요구키로
민주당 문재인 의원의 ‘대선 불공정’ 성명을 놓고 당내 지도부와 친노(親盧·친노무현)계 간 갈등이 재연되는 형국이다. 지도부는 문 의원이 직접 나서면서 국가기관의 정치 개입 의혹 정국이 ‘대선 불복’으로 비화된 데 대해 못마땅한 눈치다.
하지만 친노계는 “대선 후보 자격으로 할 말을 했을 뿐”이라며 맞섰고, 일부 강경파 사이에서는 의원직 총사퇴나 국정감사 올스톱 주장이 흘러나온다. 특히 이들 강경 초선의원들은 오는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근혜 대통령의 사과는 물론이고 내각 총사퇴, 청와대 비서실 전면 개편 등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도부의 한 의원은 2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왜 이 시점에 문 의원이 나섰는지 이해할 수 없다. 기다림의 미덕이 부족하다”며 “존재감 과시 등 자기 정치를 위해 급했던 모양”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도 “문 의원이 주장했던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 때문에 얼마나 당이 어려웠느냐”며 “이번 성명도 거의 상의도 없이 오전에 문 의원 측에서 통보했고, 지도부 의견을 전달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어 “논란이 끝난 후에 ‘부정한 요인이 있었지만 그래도 박근혜정부가 성공하도록 협조하겠다’는 대인배 식으로 갔어야 했다”고 꼬집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민주당 지도부는 고위정책회의 등에서 문 의원 성명과 관련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친노계인 박범계 의원은 라디오에 나와 “현 단계에 이것은 불복의 문제가 아니고 불법의 문제”라며 “대선 불복은 국민의 몫”이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원은 “대선 후보로서 성명을 낸 것인데 지도부가 하라, 마라 할 자격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아진 기자 ahjin82@kmib.co.kr
여야 ‘대선불복 프레임’ 2라운드 쟁점 점화…여론을 잡아라
여야의 정쟁이 ‘대선 불복이냐, 아니냐’에서 여당의 ‘대선 불복 후보’ 대 야당의 ‘부정 선거 세력’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프레임은 여야 모두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전략을 구사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새누리당은 대선 승복 여부를 끝까지 추궁하고 있고, 민주당은 지난 대선이 공정한 선거였느냐를 따지고 있다.
여야는 자신들의 주장을 국민들에게 쉽게 전달할 메시지 개발에도 주력하고 있다. ‘대선 불복 세력’ 대 ‘헌법(부정 선거) 불복 세력’, 사이버 상의 댓글과 관련한 ‘한강에 물 한 바가지 묻는 격’ 대 ‘우물에 독극물 한방울 떨어뜨리는 격’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새누리당은 깨끗한 승복을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는 반면, 민주당은 부정 선거와 수사 외압이 없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맞받아쳤다.
새누리당 지도부는 24일 “역대 대선에서 불복 사례가 없었다”면서 민주당과 문 의원에 맹공을 가했다.
황우여 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의심의 독사과, 불신의 독버섯을 경계해야 한다”면서 “역대로 어느 대선에서도 선거사범을 문제 삼아 대선 불복의 길을 걸은 일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어 “국민 주권의 선택인 대선 결과에 대해서는 깨끗이 승복하고, 문제가 있을 때는 법정기간 내에 논의를 한 후에 문을 닫는 것이 민주주의 대도(大道)”라며 “이러한 대도에 벗어나는 것은 또 다른 민주주의 전통을 흔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문 의원이 사실상 대선 불복 성명서를 발표한 것”이라며 “구구절절 궤변을 늘어 놓았지만 결국 지난 대선에서 진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내용”이라고 지적했다. 또 “도대체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대통령이 뭘 책임지란 말인가”라며 “이런 상황인데도 자신이 모든 걸 단정하는 것은 자기가 대통령 위에 군림하려는 듯한 태도임이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그는 “이런 분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지 않은 우리 국민이 참으로 현명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은 ‘유신시대의 논리’ ‘헌법 불복 세력’ 등 용어를 써가며 부정선거 여론전에 본격 돌입했다.
김한길 대표는 경기도 화성에서 열린 현장 고위정책회의에서 “국가 기관의 불법적인 대선개입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것을 ‘대선 불복’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과 정당은 헌법을 무시하는 헌법 불복 세력”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부정선거를 부정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은 긴급조치를 비판하면 무조건 감옥에 쳐 넣었던 유신시대의 논리”라고 반박했다.
전병헌 원내대표는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총체적인 부정선거”라며 “새누리당이 은폐하면 할수록 과거 정권의 문제가 현 정권의 문제로 확산된다는 점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만 모른다”고 질타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이 현재까지 드러난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정치 글’ 의혹에 대해 ‘극히 미미한 양의 댓글’ 또는 ‘한강에 물 한 바가지 붓는 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우물론’으로 대응했다. 댓글과 트위터에 의한 여론조작은 국민들이 마시는 우물에 독극물을 푼 것이고, 한 바가지라도 독극물을 풀었으면 책임을 쳐야한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박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 남재준 국정원장과 황교안 법무부 장관의 해임, 윤석열여주지청장(전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장)의 특임검사 임명 등을 촉구하며 투쟁 수위를 끌어올렸다.
하윤해 엄기영 기자 justice@kmib.co.kr
과거 대선불복 유사사례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정면충돌하고 있는 ‘대선불복 대 부정선거’ 구도는 역사적으로 반복돼온 프레임이다. 역대 대선에서도 패배 진영의 의혹 제기와 불복이 선거의 후폭풍이 되곤 했다.
부정선거의 대표적 사례로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3·15 부정선거’를 들 수 있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이기붕(부통령) 후보를 내세운 자유당 정권은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대리투표, 개표조작 등의 방법으로 조직적인 불법선거를 저질렀다.
박정희·김대중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도 문제가 됐다. 3선 개헌으로 후보 자격을 얻은 박 전 대통령이 94만표의 근소한 차이로 당선되자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관건선거’, ‘투·개표 조작’ 의혹이 불거졌다. 김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나의 투표구인 서울 마포구 동교동 투표함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전체가 무효 처리되는 등 황당한 일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그가 ‘패배승복’ 격으로 이후락 중정부장에게 건넸다는 ‘나는 박 후보에게 진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졌소’라는 말도 어록에 남아 있다.
박빙의 표차로 승부가 엇갈렸던 대선에서 안타깝게 패배한 측이 개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경우도 있었다. ‘병풍(兵風)’ 공작정치 논란이 야기됐던 2002년 제16대 대선에서 새천년민주당(현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이회창 후보를 57만980표 차이로 꺾었다.
이 후보 측에서는 전자개표 조작설이 흘러나왔다. 한나라당은 대선 패배 다음 주인 12월 24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당선무효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1월 16일에는 선거무효 소송도 추가로 제기했다.
대법원의 주관 아래 ‘수작업’ 재검표가 실시됐고 노 후보는 816표 줄고, 이 후보는 88표 늘어난 무의미한 결과가 도출됐다.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사과 성명을 냈다. 하지만 한나라당은 2004년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카드를 휘두르다 오히려 여론의 엄청난 역풍에 시달려야 했다.
유동근 기자 dk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