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재중] 정쟁에서 군이 사는 길
입력 2013-10-24 18:33
“국군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고, 국토를 방위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나아가 국제평화 유지에 이바지함을 그 사명으로 한다.”
육·해·공군 본부가 위치한 충남 계룡시 계룡대 본청 1층에 걸려 있는 ‘국군의 사명’이라는 글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내용인데 새삼 눈길이 가는 것은 최근 군이 처한 정치적 현실 때문일 것이다. 지난 총선과 대선 당시 국군 사이버사령부의 일부 요원들이 국군의 사명을 망각하고 정치적 성향의 글을 작성해 논란이 되고 있다.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주변의 안보 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군이 전력 증강에 힘을 쏟아야 할 시점에 본연의 임무와 무관한 정쟁에 휘말려 있다.
국방부 조사본부가 지난 22일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들의 ‘정치 글’ 의혹에 대한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주당의 의혹 제기로 이번 국정감사의 최대 이슈로 떠오른 터라 기자들은 발표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30여분간 이어진 브리핑이 끝난 뒤 기자들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 보도된 사이버사령부 요원 4명이 개인블로그와 트위터에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고,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예상된 결과였다.
그래도 1주일간 조사한 결과치고는 너무 부실했다. 의혹에 대한 해명은커녕 민감한 질문은 ‘수사 중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고 피해가고, 그나마 브리핑한 내용도 언론에서 제기한 것을 짜깁기한 수준에 불과했다.
국방부는 국민에게 한 점 의혹이 없도록 철저하고 투명하게 수사해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향후 수사의 성패는 군 수사기관이 군의 조직적인 개입이 있었는지, 국가정보원과 연계됐는지를 명백하게 밝혀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여야가 국가기관을 이용한 부정선거 공방을 벌이며 대치하고 있어 수사 결과에 따라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군 당국은 사즉생(死則生)의 각오로 임해야 한다. 안이하고 어설픈 대응이 사태를 키울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벌써부터 국방부 조사결과에 대해 야당이 조목조목 반박하며 추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꼬리 자르기식 수사나 은폐는 군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뿐이다. 사건이 터진 후 유승민 국회 국방위원장이 김관진 국방부 장관에게 “철저하게 수사하라. 그러지 않으면 다 죽는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김 장관이 직을 걸고라도 엄정한 수사를 약속해야 한다.
한 야당 의원이 지적했듯이 군 당국의 대응이 국정원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정원은 댓글 의혹 사건이 터졌을 때 의혹 자체를 부인했고, 사태가 확산되자 개인적인 행동이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믿지 않았고 국정조사로까지 이어졌다. 군 당국이 비슷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국정원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쟁에 휘말려 조직이 휘청거리는 우(愚)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방부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재연기 문제와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체계 구축, 차세대 전투기사업(F-X) 등 현안이 산적해 있다. 이런 엄중한 상황에 사이버사령부 일부 요원의 정치 글 의혹 사건이 터져 군 전체가 매도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군은 특정 정권의 도구가 아닌 대한민국의 군이다.
군 당국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자세로 철저한 수사를 통해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고, 책임자를 엄벌해야 한다. 그것이 정쟁 속에서 군이 살 길이다.
김재중 정치부 차장 j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