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 보석같은 詩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입력 2013-10-24 17:33


시를 어루만지다/김사인/도서출판 b

우리 현대시의 뼈를 추려내는 일은 시신을 닦아내는 염사(廉士)의 심정이 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통곡하는 유족과 슬픔을 나누면서도 내면은 완강하여 스스로 흩으러 지지 않는 자세가 염사의 덕목이어서 이 직업에게도 선비 사(士)가 붙었으리라.

시평집 ‘시를 어루만지다’(도서출판 b)의 저자 김사인(57·사진) 시인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세태 탓이 크지만 문학계마저도 쏠림이 지나쳐, 큰 문예지나 문학상의 물망에 이름이 오르지 않거나 시류를 초연한 시인들은 숫제 없는 사람 취급일 때가 많다. 우습고 딱하다. 시장과 문학 저널리즘이 빚어내는 그 왜곡과 허상을 적절히 보정하지 않고는, 이제 대소 원근의 온당한 실감 위에서 한국문학의 참모습을 만나기가 어려워졌다.”(‘책머리에’)

김소월(1902∼1934)에서 황병승(43)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시사에서 추려낸 54편의 시에 해설을 붙인 김사인의 손길은 차라리 염사에 가깝다. 그 54편은 삐지직하며 그와 전기가 통한 시들이다. 뜻밖에도 그가 맨 첫 자리에 소개한 소월의 ‘봄’은 소월 자신이 757년 작으로 알려진 두보의 ‘춘망(春望)’을 번역한 작품이다.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 있더냐/ 봄은 왔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서럽다 이를 두고 봄이냐/ 치워라 꽃잎에도 눈물뿐 흩으며/ 새 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이 두근거리는 가슴아”(소월 ‘봄’ 부분)

김사인은 소월의 ‘봄’을 첫 머리에 뽑아 앉힌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 번역시는 우리로 하여금 번역, 특히 시의 번역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게 한다. 소월은 원작의 ‘말뜻’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두보의 혼이랄 것, 원작 ‘춘망’의 넋이랄 어떤 것을 자신의 온몸으로 입고 그 넋으로 하여금 조선말 버전으로 공수를 내리게 한다. 번역에 임하는 이 황홀한 근본주의라니!”

소월의 ‘봄’은 서정주의 ‘가벼히’와 함께 ‘마음의 보석’이라는 독립된 장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 장은 산문화되어가는 시류에 가려져 있는 마음의 연금술로 시를 썼던 김종삼의 ‘묵상’, 전봉건의 ‘6·25’ 등도 묶여있다. 그런 독립된 장이 ‘인생의 맛’ ‘말의 결’ ‘말의 저편’을 포함해 모두 4개이다. 하지만 그런 분류법이야 2차적인 문제이고, 시평집에 실린 시들은 한결같이 한국어의 한 모퉁이에 숨어 있었던 명편들이라는 점이 먼저 부각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겨울날 귓불이 발그레 물들도록 길거리를 헤매고 다닌다면 시를 읽으려는 독자의 심정도 또한 그러해야 할 것이다.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 똑같은 무게로 진검승부를 펼쳐야만 시안(詩眼)이 틔이는 법이다. 그런데 김사인이 골라낸 명편들 가운데 살아있는 시인보다 작고 시인의 경우가 더 가슴을 훑어 내리는 것은 어인 일일까.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김종삼 ‘묵화(墨畵) 전문)

그리고 이런 해설이 따라붙는다. “‘목덜미’는 목숨 가진 것들의 그 중 애잔한 부위. 그곳에 ‘할머니 손’이, 거칠고 검버섯 핀 손이 ‘얹혀졌다’는 뻣뻣한 중성적 서숭을 앉혔다. 동병상련이요, 깊은 위로라는 식의 설명을 무색하게 할 만큼 이 장면이 선명하고 깊이 있는 형상에 육박하게 된 데는 ‘얹혀졌다’의 뻣뻣한 공덕이 크다.” 이 책을 읽고 이 청명한 가을에 시를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 독자라면 이미 절반의 시인일 것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