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손영옥] 독일에서 만난 서점의 향기
입력 2013-10-23 18:30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는 5000가구가 넘는다. 아파트 상가엔 없는 게 없다. 병원, 은행부터 편의점, 옷가게, 미용실, 세탁소, 문방구까지. 없는 건 딱 하나, 서점이다. 동네서점은 추억 속에나 있는 풍경이다.
가격과 편리성이 최고 가치가 되어버린 시대다. 예스24, 인터파크 등 온라인 서점에서 클릭 한번이면 오프라인 서점보다 싸게 책을 살 수 있다. 동네서점은 1990년대 후반 들어 생긴 온라인 서점 파워에 밀려 그렇게 존재 이유를 잃고 사라져갔다.
동네서점 이용 캠페인 활발
지난달 중순 국민일보 연중기획 시리즈 ‘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취재 차 방문한 베를린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서점의 향기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중산층 동네인 힌덴부르크담에 위치한 토마스 갈라 서점. 오렌지색 ‘바이로컬(BUY LOCAL)’ 표식이 붙은 출입문을 밀고 들어갔다. 20평 남짓한 공간엔 각종 책들이 도서분류법에 따라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노란색 톤의 실내는 밝고 아늑했다. 손님이 앉아 책을 볼 수 있게 협탁과 의자도 갖췄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독일 서점가에 불고 있는 바이로컬 운동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지난해 8월 라이프치히 도서박람회에 참가한 한 오프라인 서점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말하자면 동네서점 이용하기 캠페인이다.
바이로컬 운동에 가입한 회원 서점들이 주민을 상대로 “우리 지역 서점에서 사면 세금이 지역을 위해 쓰이니 아마존 같은 대형 온라인 서점 대신 우리를 이용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홍보를 위해 나눠주는 전단지 글귀는 위트가 넘쳤다. “음, 나 여기 있어.” “코앞의 세상을 구하세요.”
손님에게 책값 할인 등의 혜택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서점 주인 토마스 갈라씨는 “내가 사는 동네가 중요하다는 의식을 주민들에게 심어주자는 것”이라며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면 동네서점이 문 닫을 수밖에 없다는 걸 강조한다”고 말했다.
마침 퇴근길에 들른 듯 점잖은 차림의 중년 남성이 들어섰다. 빌헬름 슈미츠라고 밝힌 그는 “귀갓길에 종종 찾는다. 차분히 책을 뒤적이다보면 하루의 피로가 풀리고 정신적 위안까지 얻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동네서점에서 사면 잘못 고른 책을 바로 와서 바꿀 수 있어서 좋다. 이런 데선 온라인 서점에서처럼 베스트셀러 순위 조작도 일어나지 않는다”며 웃었다.
아마존 같은 온라인 유통 권력에 맞서 오프라인 서점들이 뭉친 걸 보면 독일에서도 중소형 지역 서점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토마스 갈라 서점처럼 지역 주민의 쉼터이자 문화공간 노릇을 하는 데가 건재할 수 있는 건 우리와 달리 완전도서정가제를 채택하고 있다는 제도적 이유도 있다. 이 나라에선 온라인 서점의 책값 할인이 없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독일인들의 유난한 동네사랑 정신도 한몫한다.
동네사랑 정신이 한몫
베를린에선 경영난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한 동네화랑을 주민들이 십시일반 회비를 내 살려낸 ‘쿤스트페어라인(예술후원동호회)’의 사례를 취재하기도 했다. 동호회 회원이 밝힌 후원 이유도 지역사랑에 다름 아니었다. “이 화랑은 우리 지역 문화사랑방입니다. 이게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요.” 그래서 선뜻 연 80유로(약 11만6000원)의 회비를 내는 건 오프라인 공간이 뿜어내는 향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 싼 것, 더 편리한 걸 추구하다보면 정작 중요한 사람 냄새를, 세상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를 놓치게 된다. 우리 사회가 경쟁사회로 치달으면서 잃어버린 가치다. 책 냄새 가득한 서점의 향기를 맡고 싶다.
손영옥 문화생활부장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