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나들 (7) 10년 기도응답에 10년 못본 사촌 “건강한 내 간을”
입력 2013-10-23 17:19
간경화가 심해지자 다양한 합병증이 나타났다. 식도정맥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오르는 식도정맥류가 계속 생겼다. 가려움도 심해졌다. 온몸을 긁다 보니 여기저기 피멍이 들었다.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멈추지 않아 애를 먹었다. 혈소판이 급격히 줄었기 때문이었다. 황달 증상이 나타나고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종종 간성혼수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아내와 나는 기적처럼 건강이 회복될 것을 항상 기대했다. 하지만 투병은 10년 동안 이어졌다. 합병증까지 심해지자 기적만 기다릴 수 없었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간이식을 해야 했다. 간이식만이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10년의 투병기간 동안 의학이 크게 발전했다. 간이식 수술 성공률은 평균 90%가 넘었다. 건강보험 적용으로 1억원이 넘었던 수술비도 수천만원으로 줄었다.
문제는 이식받을 간이었다. 막내인 나는 위로 형이 두 명 있었다. 하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간염균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간이식이 불가능했다. 아내는 간 크기가 작아 일부를 떼어 줄 수 없다는 의학적 판정을 받았다. 둘째형수가 혈액형이 일치하면 간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빈혈이 있었다. 빈혈을 치료하면 간 제공이 가능했지만 치료가 수개월 이상 걸렸다. 내겐 그만한 시간이 없었다. 가까운 친족들은 간을 주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몸 상태는 계속 나빠졌다. 아내와 나의 마음은 평안했다. 지금까지 동행해주신 하나님을 신뢰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났을 때였다. 아버지는 간 제공자가 나타났다고 했다. 10년 동안 얼굴 한번 못 보고 지내던 사촌동생이 간을 주기로 했다. 동생은 음주운전으로 인사 사고를 내는 바람에 교도소에 있었다. 그래서 간을 줄 수 있는 가족으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이 서른둘에 미혼이어서 본인이 기증을 하고 싶어도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수술이 불가능했다. 그런 복잡한 상황이라면 내가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분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사촌동생이 선뜻 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혹시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주변에서 걱정했다. 나도 사실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왕이면 서둘러 수술하고 싶었다. 병원에서는 수술 대기 환자가 많아 한 달 이상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빨리 수술할 수 있는 다른 병원으로 옮겼다. 그래도 3주를 기다려야 했다. 그때 3주는 30년 같았다.
수술이 시작됐다. 마취했던 내게는 잠깐 낮잠을 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떠보니 몸 구석구석에 호스와 바늘이 꽂혀 있었다. 수술이 10시간 동안 진행됐다고 했다.
‘이제 끝났다. 살았다.’
10여년 기나긴 싸움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지켜보던 아내도 눈물을 쏟았다. 나는 빠른 속도로 회복됐다. 3주 만에 걸어서 퇴원했다. 함께 집으로 돌아온 사촌동생이 말했다.
“의사가 그러더라고. 배를 열었더니 간이 예상보다 크고 두툼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배를 더 찢었대. 봐 봐 형보다 내 수술 자국이 더 길잖아!”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기증자의 간이 클수록 수술 경과가 좋고 회복도 빠르다고 했다. 순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됐다.
사촌동생은 교도소에서 금연 금주를 했고 생활도 규칙적이었다. 기상과 취침도 정해진 시간에 했고, 규칙적인 운동을 했다. 가장 좋은 건강 상태였다. 당연히 간도 최상이었다. 동생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