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화산의 속살’ 참으로 곱구나… 제주도 수월봉 트레킹

입력 2013-10-23 17:26


성산일출봉에서 솟은 태양이 한라산을 넘어 수월봉 서쪽 수평선에서 제주도의 깊고 푸른 바다와 입맞춤을 시도한다. 순간 ‘화산학의 교과서’로 불리는 수월봉의 해안절벽이 노을에 젖어 붉게 물든다. 화산 폭발과 함께 솟구쳐 오른 뜨거운 용암이 이런 색깔이었을까. 화산재가 쌓이고 쌓여 형성된 거친 질감의 주름진 지층이 화산섬의 속살을 아낌없이 드러낸다.

두터운 빙하가 제주도를 뒤덮었던 1만8000년 전. 제주도 서쪽 끝 한경면의 고산리 들녘에서 지축을 흔드는 강력한 폭발음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지표를 뚫고 나온 뜨거운 마그마는 급격하게 식어 용암으로 굳었다. 하늘로 치솟았던 엄청난 양의 화산재가 그 용암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탄생한 봉우리가 수월봉과 차귀도이다. 그 후 해수면 상승으로 차귀도는 섬으로 변하고 수월봉은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화산폭발의 역사를 간직한 해안절벽으로 거듭났다.

수월봉은 제주도에서도 바람이 드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2003년 태풍 ‘매미’가 한반도를 강타했을 때 수월봉 정상에 위치한 고산기상대의 풍속계에 기록된 순간풍속은 초속 60m. 가로수가 뽑히고 자동차가 날아갈 정도로 강력한 바람으로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수월봉 정상에 뿌리를 내린 키 작은 나무의 가지가 한쪽으로 쏠려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산재 지층은 수월봉 남단에서 자구내 포구까지 ‘수월봉 엉알길’로 불리는 4.6㎞ 구간의 해안산책로 중 고산기상대가 위치한 정상의 절벽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엉알은 바닷가 절벽을 뜻하는 제주 사투리 ‘엉’과 아래쪽을 뜻하는 사투리 ‘알’이 합쳐진 말. 수월봉 엉알길과 제주올레길 12구간 일부가 겹치지만 제주올레길이 수월봉 정상을 지나는 바람에 정상 아래에 위치한 화산재 지층은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수월봉 남단의 찻길 주차장에서 곧바로 바닷가로 내려서면 ‘해녀의 집’이 반긴다. 고산리 바다는 전복, 소라, 미역, 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의 보고. 그 많던 해녀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지금은 늙은 해녀 10여 명이 물질을 하다 휴식을 취하거나 해산물을 다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해녀의 집에서 수월봉 해안절벽까지는 200m 길이의 검은 모래 해변이 펼쳐진다. 검은 모래는 화산재 지층이 파도에 깎여 작은 입자는 바닷물에 씻겨 나가고 남은 굵은 용암편. 너무 부드러워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검은 모래 해변을 걷다보면 화산재 지층 사이에 둥지를 튼 말똥게를 만난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바글거리던 말똥게들이 인기척에 놀라 순식간에 지층 사이로 사라진다.

검은 모래 해변이 끝나면 푸른 바다와 잇닿은 절리가 자구내 포구까지 광활하게 펼쳐진다. 절리(節理)는 뜨거운 용암이 굳으면서 부피가 줄어 표면이 벌집처럼 생긴 육각형의 연속지대. 거북등처럼 표면이 갈라진 절리를 거북등절리라 하고 육각형이나 오각형 기둥모양으로 발달한 형태를 주상절리라고 한다.

1.5㎞ 길이의 수월봉 해안절벽 중 화산재 지층이 가장 웅장한 곳은 해발 77m 높이의 수월봉 정상 아래. 해안절벽은 아랫부분이 파도에 깎여나가는 바람에 윗부분이 툭 튀어나온 돔형으로 거대한 동굴을 방불케 한다. 두터운 종이를 수만 장 쌓아놓은 듯 화산재 지층에는 세월의 무늬가 켜켜이 새겨져 있고, 곳곳에 고구마 형태의 화산탄이 박혀 있다. 이곳을 ‘화산학의 교과서’로 부르는 이유다.

화산이 폭발할 때 하늘높이 솟아오른 화산재 덩어리가 회전운동을 하며 날아가면 고구마처럼 길쭉해진다. 이 덩어리가 화산재에 박혀 굳어진 것을 화산탄이라고 한다. 화산탄은 수월봉 입구의 화산재 지층에 부지기수로 박혀있다. 수월봉의 화산활동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수월봉 입구에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만든 갱도진지 몇 개가 검은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처럼 생긴 갱도진지는 말똥게를 비롯한 동물과 도깨비고비로 불리는 양치식물의 보금자리. 안타깝게도 화산재 지층이 약해 며칠 전에도 갱도진지 상층부가 무너져 내려 보존대책이 시급하다.

수월봉 입구에서 자구내 포구까지 1㎞ 구간은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하다. 산책로 곳곳에는 화산재 지층으로 스며든 빗물이 흘러나오는 녹고물을 비롯해 샘이 몇 곳 있다. 녹고물에는 녹고와 수월이 남매에 얽힌 애절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녹고와 수월이 남매가 약초를 캐러갔다가 여동생 수월이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져 죽자 슬픔에 싸인 녹고가 흘린 눈물이 고여 녹고물이 되었다고 한다. 전설 때문인지 녹고물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눈물처럼 애절하게 보인다.

노란 감국과 연보랏빛 해국이 절벽을 수놓은 산책로를 쉬엄쉬엄 걷다보면 ‘수월봉 엉알길’의 종점인 자구내 포구에 닿는다. 해풍에 건조 중인 한치가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자구내 포구에서 낚싯배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차귀도는 죽도·지실이섬·와도 등 세 섬과 작은 부속섬으로 이루어진 무인도.

거대한 고래가 바다에 떠있는 형상의 차귀도는 제주도에서 해질녘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수월봉 정상에서 만나는 일몰이 감동적이다. 차귀도 앞바다에 황금빛 외투를 벗어던진 해가 수평선과 황홀한 입맞춤을 하고 수월봉 해안절벽이 황금색으로 물드는 순간 하늘과 바다를 수놓은 붉은색 노을은 화산이 폭발하던 그 순간을 연출한다.

제주도=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