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재판’ 서울동부지법 법정 가보니 “국민 법감정·전문지식 격차 줄이려는 취지”
입력 2013-10-22 18:24 수정 2013-10-22 22:57
생후 일주일 신생아의 의료사고 재판이 벌어진 22일 오전 서울동부지법 15호 법정. 일반 재판과 다른 생소한 장면이 여럿 연출됐다. 피고인 병원 측 변호사 바로 옆자리에 소아청소년과 의사 등 전문의 4명이 앉았다. 방청석 맨 앞줄에는 시민 5명이 별도로 자리했다. 이들은 아이 부모와 병원 측 주장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거나 종이에 빼곡히 메모했다.
배심원도, 증인도, 참고인도 아닌 이들은 동부지법이 선발한 ‘법정자문단’이다. 재판은 아이가 의료과실로 신체장애를 얻었다며 부모가 대학병원에 11억1600만원의 배상을 청구한 민사소송이었다. 2011년 5월 1일 태어난 아이는 일주일 뒤 황달 등의 증세를 보여 병원에 갔지만 별다른 이상 징후가 없어 귀가했다. 그러나 다음날 패혈증 증세가 나타났고 결국 중장염전 판정을 받았다. 아이는 인지기능 장애를 앓게 됐다.
자문단은 1시간30분간 진행된 재판 내내 주의 깊게 상황을 체크했다. 자문단원인 주부 오경실(54·여)씨는 꼼꼼히 메모하느라 A4 용지 한 장을 꽉 채웠다. 아이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리자 안타까운 눈빛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재판 내내 자리를 뜨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통상 의료 분쟁은 전문가인 의사와 병원을 상대하는 것이어서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인은 치밀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막상 법정에 서더라도 그저 억울함을 호소하곤 한다. 이렇다보니 재판 결과에 불복하는 경우가 많고, 판결이 내려진 뒤에도 승복하지 못해 ‘병원 앞 시위’가 수시로 벌어진다. 이 같은 국민 법감정과 전문 지식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동부지법은 사상 처음 의료 분쟁 사건에 법정자문단을 꾸리는 ‘열린 의료재판’을 도입했다.
재판에서 원고 측 변호인은 “의료진은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조치를 해야 하는데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며 배상을 주장했고, 피고 측은 “여러 가능성을 놓고 진단·검사·치료를 수차례 반복했다. 의학적으로 가능한 모든 처치를 다한 병원에 책임을 묻는 건 가혹하다”고 맞섰다.
재판이 끝난 후 자문단은 2시간 넘게 열띤 토론을 벌였다. 시민들은 의사들에게 의학용어부터 차근차근 물었고 의사들은 일반인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언을 구했다. 자문단에 참여한 삼성서울병원 신경외과 어환(60) 교수는 “병원 책임만 강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양한 관점을 접할 수 있어 좋았다”고 했다. 오씨는 “엄마 입장에서 보면 병원의 잘못이지만 의사들 얘기를 들어보니 공감되는 부분도 있었다”고 말했다.
‘열린 의료재판’ 자문단의 의견은 법률적 효력이 없어 배심원과는 다르다. 전문 의료인 외에 일반 시민도 참여해 전문심리위원 제도와도 구별된다. 다수결 등으로 의견을 모으지 않고 개별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특징이다. 일반 시민이 법정에서 재판에 대한 특정 집단의 입장을 밝히는 미국의 ‘법정의 친구(Amicus Curiae)’ 제도에서 착안해 도입됐다. 미 연방대법원은 이 제도가 깊이 있는 심리에 기여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서울동부지법 최문수 공보판사는 “자문단에서 전문가와 일반 시민이 함께 의견을 나누다 보니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