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에 대한 궁금증이 건강한 믿음 만든다
입력 2013-10-22 17:21
성경의 핵심 난제들에 답하다/크리스토퍼 라이트 지음, 전성민 옮김/새물결플러스
하나님의 계시는 완전하다. 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읽지만 모든 것을 이해하며 읽지 못한다. 게다가 항상 기쁨이 충만해 읽는 것도 아니다. 보면 볼수록 난해한 구절과 만나며 근심이 쌓인다. 이뿐인가. 살아가는 동안 직면하게 되는 각종 고통과 가까운 이들의 죽음, 정의의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도대체 왜?’를 묻게 된다.
성경의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과 대화를 시작했다. 그의 질문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가 정의로운지 묻는 것이었다. 모세도 몇 번이고 하나님께 질문했다. 심지어 자신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다. 다윗은 가족과 관련된 하나님의 관대하심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어 그저 ‘내가 누구이오며’(삼하 7:18)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욥기 전체는 상실과 고난의 연속에서 하나님께 퍼붓는 질문으로 점철된다. 시편은 ‘왜’ ‘언제’ ‘어느 때까지’와 같은 번민들로 가득하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뿐 아니라 반기독교적 무신론자들도 함께 제기하는 성경의 난제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중 악과 고통, 가나안 정복, 십자가, 종말을 깊이 관찰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단순히 난제풀이용 ‘해설집’은 아니다. 신앙 본질에 대한 저자 자신의 고민이 곳곳에 담겨 있다.
그는 우선 악이라는 불가사의에 대해 “악은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대로의 창조 세계에 본질적으로 속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구속하실 창조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악은 이해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저항해서 물리치라고 있는 것이다. 악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침입자이며 거의 몰아낼 수 없을 정도로 ‘정착한’ 생경한 존재다(60∼61쪽).
가나안 정복은 구약성경 전체의 틀, 하나님의 주권적 정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 가나안 정복은 구약성경의 일부다. 정복은 제네바 협정의 기준이 아니라 고대 근동문화의 맥락 안에서, 그리고 제한된 역사의 범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가나안 민족이 진멸됐다는 말도 수사적 과장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사기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계속 등장하기 때문이다.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전쟁이 가나안 정복과 같은 방식으로 묘사된 것도 아니다. 따라서 성경을 믿는 미래 세대는 ‘가나안 정복 스타일’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 성경 전체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종말에 대한 설명은 신학적 입장을 고려해 저자의 입장을 밝히진 않았다. 대신 성서학자로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성경 다른 곳에는 나오지 않고 짧은 한 구절에만 나오는 용어와 관련된 해석 논쟁은 피할 것. 유행하는 ‘마지막 때’ 전문가들로부터 읽거나 듣는 모든 것은 성경을 면밀히 연구해 분별력을 가지고 점검할 것. 특히 천년왕국, 휴거,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교조적 예언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리할 것 등이다. 이스라엘 땅이 영원히 거룩한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땅과 관련된 모든 실재들은 그리스도께 옮겨졌고 거룩한 장소로서의 땅은 그리스도인에게 의미를 잃었다”고 단언했다(266쪽).
책은 존 스토트 목사의 계승자이자 복음주의권의 저명한 구약학자로서 저자의 신학과 경험을 총동원한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 신앙은 이해를 넘어 신비한 영역이 존재한다.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지만 이해가 신앙의 종착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질문 자체를 터부시해 왔다. 정확무오한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했고 의심하는 순간 믿음 없는 사람으로 ‘찍혔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배교나 타락이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균형의 징후다. 질문을 통해 우리 믿음이 더욱 견고하게 되면 말이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