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또 대선불복인가

입력 2013-10-22 18:27


“5년마다 반복되는 악습, 언제쯤이면 종지부 찍고 쿨한 승복문화 정착될까”

제18대 대선 개표가 거의 끝나갈 무렵인 지난해 12월 19일 밤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한다는 연설을 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모든 것은 다 저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박근혜 후보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박 당선인이 국민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펴줄 것을 기대합니다. 국민들께서도 이제 박 당선인을 많이 성원해주시길 바랍니다.” 문 후보는 박수를 받았다. 박 당선인은 다음날 문 후보에게 전화해 “앞으로 국민을 위해 협력과 상생의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승자와 패자가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에 우리나라에도 승패에 승복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아나갈 것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10개월이 흘렀다. 승복의 문화는 정착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을 담당하는 검찰 수사팀에 대한 외압 의혹이 불거지면서 국정원 사태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군 사이버사령부의 대선개입 의혹마저 불거졌다. 그러자 민주당 내에서 대선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잇따르고 있다. 22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설훈 의원은 “지난 대선 자체가 심각한 부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선거 결과가 승복할 수 있는 것이었느냐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지원 의원은 “국정원, 군, 보훈처의 총체적 부정선거다. 선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세균 상임고문은 21일 트위터에 “지난 대선은 국정원과 군이 개입된 명백한 부정선거”라며 박근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글을 올렸다.

사례는 더 있다. 양승조 의원은 지난 14일 국정감사장에서 기초연금이 후퇴한 책임소재를 추궁하다가 “대통령이 국민의 표를 훔쳤다. 어르신들 상대로 거짓말을 하고, 심하게 말하면 사기를 쳤다”고 했다. 홍익표 의원은 지난 4월 트위터를 통해 “박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도둑질했다”고 했고, ‘태어나선 안 될 사람’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다고 언급한 의원도 있었다.

민주당의 공식 입장은 대선 결과에 불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등을 대선 결과와 연관짓지 않는다는 게 민주당 방침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선 대선불복 움직임이 점차 확산돼 가는 모양새다.

민주당 일각에서 제기되는 대선불복론에는 국가기관의 부당한 개입이 없었다면 대통령은 문재인이라는 인식이 내포돼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진 이유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안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을 얻는 데 실패했고, 산업화의 부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해 중장년층으로부터 외면당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비롯한 노무현정부의 정책마저 뒤집는 오락가락 행보 등이 중요한 패인이라는 얘기다. 민주당도 이와 유사한 결론을 내린 바 있다. 그때는 국가기관이 이처럼 온라인상에서 조직적으로 간여한 줄 몰랐다고 해명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온라인 선거운동에 있어서만은 민주당이 항상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선거 패배 외부요인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작은 선거라도 패한 쪽이 결과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하물며 대선에서 진 경우라면 심리적으로 승복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명박정부 출범 초기인 2008년의 ‘광우병 촛불집회’와 2002년 한나라당의 사상 첫 대선 재검표 요청, 1998년 한나라당의 김종필 총리 후보자 인준거부 파동이 벌어진 것은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정서 때문이었다. 새 정부를 흔듦으로써 지지자들을 재결집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민주당의 이번 불복 움직임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5년마다 반복되는 ‘대선불복병’으로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지불했다. 민주당이 악습을 끝내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언제쯤이면 우리 정치권에 쿨한 승복문화가 자리잡을까.

김진홍 논설위원 jhkim@kmib.co.kr